[칼럼] 종교 없는 삶, 눈물 없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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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의 칼럼]

(사진=스마트이미지)

 

시인은 스스로 눈물이 많은 사내였음을 자신의 산문집 <우리 얼마나="" 함께="">에서 고백한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슬픈 장면에 자주 눈물을 흘렸고, 음악을 듣다가 감동해서 울기를 잘했다고 말한다. 시인이 가장 자주 눈물을 흘리는 곳은 미사가 한창인 성당 안이라는 것이다. 1980년대 초에는 성당에 들어가 미사 시작 전 성가대 연습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고 했다.

시인 마종기의 이야기다. 그에게 '눈물'은 경외의 삶을 살아가는 자가 지닐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 셈이었다. 그런가하면 맑고 아름다운 영혼을 지탱해 주는 보물인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실컷 울고 싶지만 울 수 없는 강퍅한 감정으로 살아가고 있다.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불치병 환자처럼 되어버렸다. 눈물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최면에 걸려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최근 화제가 된 종교사회학자 필 주커먼(Phil Zuckerman)의 신작 <종교 없는="" 삶="">을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이 '눈물 없는 삶'이었다. 저자는 종교 없이도 불안하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경외주의'(aweism)로 정리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신을 경외하는 대신 자신의 삶은 물론 모든 것을 신비한 눈으로 대하며 경외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종교 아닌 종교가 등장하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노력이 결국 '눈물 없는 삶'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생각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종교 없는 삶이 공론화된 것은 급변하는 사회 문화의 패러다임 속에서 종교 특히 개신교의 위상이 추락한 것이 요인이다. 교회는 스스로 부패하고 타락했으며 세상은 그런 교회를 불신과 조롱거리로 바라본지 오래다. 전국 곳곳에 편의점보다 많은 교회가 있지만 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 삶의 치열한 경쟁 속에 지치고 찌들어 있다. 교인들조차 교회에 나가 위로를 받고 스스로 낮아짐으로 평안을 찾아야 하지만, 교회 밖으로 나오는 순간 세상의 탁류에 휩쓸려 신심을 잃어버리고 악다구니가 된다.

종교사회학자 정재영 교수는 '기독교가 처음 한국 땅에 전래될 때만 해도 기독교는 새로운 문물의 전달자였고 구질서를 혁파하고 새로운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 중요한 자원'이었다고 말한다. 그런가하면 교회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앞장섰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다시 세우는데 크게 일조했다. 때문에 당시 교회에 다닌다는 것은 그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목사는 그 지역에서 존경받는 어른이었다.

 

불과 20-30여년 사이 교회는 자신들만을 위한 이기적 공동체, 돈과 권력에 눈이 멀어 부정과 부패로 얼룩진 조직으로 바뀌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이 그렇다. 대형교회들이 줄줄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것은 돈과 여자 그리고 세습으로 얼룩진 목회자의 추한 모습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교회를 나가기보다 교회 밖에서 위로받을 수 있는 무엇인가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교회를 탈출해 자기만의 신앙을 찾아 유목하는 기독교인들도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이런 불행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 종교가 아니라 종교인의 문제인데도 이를 직시하는 이는 드물다. 나쁜 종교인은 있을 수 있어도 나쁜 종교는 없기 때문이다. 타락한 것은 종교인이지 종교가 아니다. 나쁜 종교는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건 비기독교인이건 종교 없는 삶을 기대하면서 마음의 위로를 얻고, 평화를 누릴 수 있는 대안을 찾아 나서고 있다. 필 주커만이 말하는 '경외주의자'의 길이다. 종교 없는 삶으로까지 내몰린 우리의 슬픈 현실을 바라볼 때마다 마종기 시인의 '기도'라는 시가 떠오른다.

하느님
나를 이유 없이 울게 하소서.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게 하시고
눈물 속에서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죽어서는
그들의 눈물로 지내게 하소서.

많은 이들이 이 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신으로 하여금 눈물 흘리게 해달라는 한 인간의 간절한 기도가 참된 위로이자 평화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마음이 흔들릴 때면 이 시를 암송하면서 마음속 거친 파도를 잠재운다. 무한한 우주 공간 속에서 모래알 보다 작은 지구 행성,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눈물'은 축복이다. 펑펑 울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경외를 통해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 없는 삶'도 좋지만, 이유 없이 울 수 있는 겸손과 자애와 숭고한 삶이 아직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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