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우리도 진보의 탈을 쓴 여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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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의 칼럼]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 (사진=연합뉴스 제공)

 

이틀 전 저녁 모임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다. 임기가 1년 남은 모 회사 CEO는 "나도 그랬을 것 같다"고 말했다. 옆자리에 있던 후배는 "변곡점이 될 것 같다"고 분석했다.

며칠 전 공개된 공직자 재산신고에서 25억7000만 원에 재개발지구 상가건물을 매입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된 '그'에 대해 얘기하던 중 나온 말들이었다. '나도 그랬을 것 같다'는 심리는 노년에 대한 불안을 공감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반면 '변곡점이 될 것'이라는 우려는 진보정권이 신뢰를 잃고 하향곡선을 그릴 수도 있다는 진단이었다.

모두에게 충격을 줬던 '그'는 1963년생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태어난 베이비부머 세대다. 이들 세대는 청년인구보다 노인인구가 많은 시대를 살아가야한다. 평균수명도 크게 늘어나 80대 중반을 넘어서도 좀처럼 죽지 않게 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노동현장에서 퇴직하고 나서도 무려 20~30여년을 더 살아야 한다.

이 길고 긴 노년의 시간이 불안할 수밖에 없다. 절대다수는 가난한 노년을 각오해야 한다. 그나마 국민연금으로 매달 120만원에서 150만원을 받게 되는, 직장에서 정년퇴직한 노인들의 경우는 행운아에 속한다. 번번한 직장도 없이 일용직 내지는 알바자리를 전전한 노인들의 경우 연금은 그림의 떡이다. 그들은 노쇠한 몸이지만 노동을 하지 않으면 노년의 생계를 이어갈 수 없다.

그는 어느 날 이 같은 끔찍한 미래를 직시하게 됐고, 노년에 필요한 '빵'을 얻기 위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 같다. 노년의 시간이라는 끔찍한 유령이 나타나자 진보적 이념의 잣대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노년의 날을 안정적이고 풍요롭게 보내기 위해서는 지금이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운 좋게 권력의 자리에 올랐고, 기회가 찾아오자 경제적 불평등과 경제정의에 대한 자기 신념을 지키기 보다는 노년에 있어야 할 '빵'에 유혹된 것이 분명하다. 2011년 기자시절에 쓴 칼럼에서 '전셋값 대느라 헉헉댔다'던 그는 불과 8년 만에 재개발지구의 상가건물을 25억7000만 원에 매입했다. 놀라운 것은 매입 금액 가운데 3/2에 달하는 16억4580만원은 빚을 얻은 것이었다. 이거야말로 보장된 투기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모험 아닌가.

그런데도 그는 '상대적 가난'이라는 자기 합리화와 자기 연민에 빠져있다. 그 결과 '각자도생'만이 살길임을 몸소 보여줬다. 자기가 몸담고 있는 정부를 스스로가 신뢰하지 못하는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준 셈이다. 국가도 자치단체도 그 누구도 노년에 들이닥칠 가난을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는 자기 합리화를 잘하고 상대 입장보다는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한다. '여우와 신포도'가 그렇고 '여우와 두루미'도 그랬다. 그 역시 '집도 절도 없는' 처지에 '결혼한 지 30년 가까이 내 집이 없었다'면서 자신을 합리화했고 자기 입장만을 토로했다. 공직에서 물러나면서도 끝내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억울한 것이다. 노년의 빵을 준비한 자신을 비난하는 모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날 모임에 참석했던 누군가가 "우리도 진보의 탈을 쓴 여우일까?"하고 농담처럼 가볍게 물었다. 호기심 섞인 질문일 뿐이었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누구도 '그'가 만든 '노년의 빵'을 정죄할 만큼 자신의 양심이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와 같은 또 다른 여우들이 진보의 탈을 쓰고 호시탐탐 노년의 빵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분노 때문일까.

꽃샘추위가 찾아왔던 그날 밤 우리는 '매일 밤 촛불을 들고 나와 목이 터져라 외쳤던 시민들에게 이보다 더 슬프고 무서운 일은 없을 것'이라는 데에는 동의했다.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다시 겨울인 듯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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