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도 증인도 '판사'…비로소 펼쳐진 법정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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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 임종헌, 검사에 호통치고 증인신문도 직접
증인 정다주, 구체적이지만 자기변호도 빼놓지 않는 고도의 증언 전략
재판부, 하자 없는 심리에 '골머리'…13시간 마라톤 재판도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TV드라마와 영화 속 법정 장면은 대부분 허구다. 검사와 변호사가 일어서서 재판부나 방청석을 향해 극적인 동작을 취하거나 증인 앞을 어슬렁거리는 일은 없다. 변호인이 검사를 향해 호통을 치거나 증인이 진술을 뒤집어 재판정을 뒤흔드는 일도 보기 어렵다. '보통 사람들의 보통 재판'은 검·변 양측이 각자 준비해온 서류 중 중요 부분을 읽고 재판부가 중간에서 절차적인 진행을 하는 수준으로 진행된다. 피고인이 직접 말하는 모습은 선고 전 마지막 공판에서 최후진술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흔치 않고, 이마저도 길지 않다. A4용지 한두 장을 넘지 않는 분량이 대부분이지만 재판부는 이를 직접 듣지 않고 제출만 하라고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에서는 말 그대로 '법정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다. 피고인은 물론이고 앞으로 재판에 나올 주요 증인들이 모두 재판에 빠삭한 판사들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11일부터 이달 4일까지 총 6번 진행된 공판에서 검·변 양측은 상대방의 진술 중 수시로 "이건 좀 문제가 있다"고 공방전을 벌였다. 피고인이 검사에게 호통을 치는가 하면 증인신문도 직접했다. 지난 2일 공판에는 현직 부장판사인 정다주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심의관이 증인으로 나와 답변의 교과서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수많은 사건을 다뤄온 재판부와 임 전 차장, 정 부장판사도 아마 처음 경험하는 '재판'일 것이다.

scene #1 아직 '범죄자' 아닌 피고인의 권리

형사소송법 제275조의2는 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고 정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피고인은 우선 검찰 조사 결과 공소가 제기됐다는 사실만으로 확정적인 범인 취급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는 피고인이라면 더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다.

임 전 차장은 예외다. 매번 재판마다 피고인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지난달 11일 첫 공판기일에 하늘색 수의를 입고 나온 임 전 차장은 A4용지 12페이지 분량의 글을 읽으며 자신의 무고함을 강조했다. 재판에 나올 때 피고인은 사복을 입을 수 있지만, 죄를 뉘우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일부러 수의를 입기도 한다. 그러나 임 전 차장의 경우 전직 고위 법관이 수의를 입은 모습을 보고 법조계가 일종의 충격을 받기를 바라는 것으로 읽혔다.

임 전 차장은 2회 공판부터는 정장 차림으로 출석하면서 매번 상당 분량의 구술변론을 하고 있다. 지난달 26일에는 구치소에서 연필로 직접 쓴 A4용지 17페이지 분량의 의견서를 2시간가량 읽었다. 형사소송법상 구두변론주의 원칙에 따라 당연한 것이지만, 빠른 소송 진행을 위해 '보통의 재판'에선 잘 지켜지지 않는 과정이다.

임 전 차장은 지금까지 공판 과정에서 공소장 일본주의 위배, 검찰 압수수색의 위법성, 피의자 공표 문제 등 절차적 결함을 철저히 파고들었다. 지난 2일 첫 증인신문이 열리기 전까지 4번의 공판은 모두 이러한 절차적 문제를 다투느라 지나갔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 심리를 최대한 지연시키기 위한 전략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피고인으로서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권리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검찰이 정 부장판사에 대해 증인신문을 하는 중에도 임 전 차장은 "유도신문"이라거나 "증인이 직접 경험한 사항이 아니라"며 수차례 이의를 제기했다. 특히 미리 교부된 서증 순서를 보면서, 검찰이 증인에게 질문을 하기도 전에 이의를 제기해 자신에게 불리한 질문이 기록되는 것조차 방어하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자 검찰 측은 "검찰이 잘못하면 재판장이 정리할 수 있는데 지금은 이것이 누구의 소송인지 혼란스럽다"고 비판했다. 임 전 차장이 피고인의 지위를 넘어 재판장 노릇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에 재판부는 "일단 검찰 의견은 듣고 이의를 제기하라"며 정리하기도 했다.

임 전 차장은 증인신문도 증인에게 구체적 사실관계를 묻기 보다는 자신이 구두변론에서 계속 강조해오던 '사법행정의 특수성'에 대한 동조를 이끌어내는 식으로 활용했다. 밤 11시가 넘어 이어진 반대신문에서 임 전 차장은 정 부장판사에게 "유럽의 경우 사법행정 업무를 법무부가 담당하는 것을 알고 계시죠?", "우리나라는 사법부가 자체적으로 담당해서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서 자기 책임 하에 독자적이고 적극적인 사법행정을 하는 것을 알고 있죠?" 등의 질문을 던졌다.

형사사건 전문 한 변호사는 "임 전 차장 본인은 주에 두 번씩 재판을 받으면서 피고인의 방어권을 충분히 보장받지 못해 불만이 많다지만 보통 재판들이 이정도만 피고인의 변론 기회 등을 보장한다면 재판의 품격이 훨씬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scene #2 증인으로 나온 판사, '답변의 정석' 보여줘

"네. 그렇게 진술했습니다."

임 전 차장 재판에 첫 증인으로 나온 정 부장판사는 무려 13시간을 증인석에 앉아 차분히 답변했다. 질문에는 "네·아니오" 단답형이 아니라 "그렇게 진술한 적 있습니다. 그처럼 진술한 것이 맞습니다. 다만…." 식으로 돌려 답변하고 설명을 덧붙이는 화법을 구사했다. 임 전 차장 당시 법원행정처의 관료적인 분위기 등을 묻는 민감한 질문에는 "업무가 과중해 그에 따른 어려움은 있었지만 피고인 개인에 대한 어려움 등은 정확히 알고 있는 바 없다"고 선을 그었다.

정 부장판사는 2013~2015년 법원행정처에서 기획조정심의관으로 일하면서 당시 기획조정실장이던 임 전 차장의 지시를 직접 받은 인물이다. 앞으로도 정 부장판사처럼 당시 법원행정처에서 심의관으로 일하면서 임 전 차장의 지시에 따랐던 시진국·박상언·김종복·조인영·전지원 등 부장판사들이 줄줄이 증인으로 소환된다. 최근 개업한 김종복 전 광주지법 목포지원 부장판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현직이다.

이미 정 부장판사와 박 부장판사는 지난해 말 대법원에서 각각 감봉 5개월 징계를 받았다. 시 부장판사도 감봉 3개월에 처해졌다. 나머지 법관들은 지난달 5일 검찰이 사법농단 사태와 관련해 대법원에 비위사실을 통보한 법관 66명에 포함됐을 가능성이 크다. 검찰이 아직 이들에 대한 기소의견을 마무리 짓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만큼 임 전 차장과 양 전 대법원장 재판의 진행 방향에 따라 추가 수사를 받을 가능성도 남아있다.

최대한 협조적으로 증언하면서도 자신의 구체적인 행위에 대한 진술에는 많은 부연설명을 덧붙일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또한, 아직 법관 사회에 남아 일하고 있는 만큼 임 전 차장 개인에 대한 평가나 감정이 개입될 수 있는 답변은 철저히 피했다.

검찰 측이 "심의관들이 피고인의 지시 방향과 다른 보고서를 작성해오면 혼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데 알고 있냐"고 묻자 정 부장판사는 "제가 들은 기억은 없다. 본 기억은 더더욱 없다"고 말했다.

임 전 차장이 같은 지시를 여러 심의관에게 한 적이 있냐는 질문에는 "사안이 시급을 다툰다든지 어느 한 실·국의 전담업무라고 볼 수 없는 경우에 여러 결과를 취합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답변했다. 이는 임 전 차장이 원하는 보고서 결론을 얻기 위해 여러 심의관에게 같은 업무를 지시했다는 증언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지만 정 부장판사는 이러한 질문들에 교과서적인 답변으로 갈음했다.

이외에도 정 부장판사는 검찰의 질문이 길어지거나 조금이라도 불분명하면 "다시 한 번 말씀해달라"고 요청했다. 수십 차례 다시 말해달라는 요청이 반복되자 검찰석의 일부 검사들은 불편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정 부장판사가 재판부에 남긴 마지막 말은 임 전 차장에 관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나 동료들에게 추가로 내려질 수 있는 처벌이나 평가를 염두에 둔 듯한 내용이었다. 그는 "당시 저와 같은 평판사(단독판사)급의 일반 심의관들이 법원행정처 조직에서 어떤 인식 하에 맡겨진 업무를 수행하고 특히 상급자의 지시를 얼마나 자세히 이해하고 수행했는지를 재판부에서 깊이 살펴달라"고 당부했다.

scene #3 원칙으로 돌아간 재판부

사상 초유의 사법농단 사태로 사법부는 한솥밥을 먹던 선후배를 심판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법정 안에서 가장 선배 기수일 피고인과 매번 10명가량이 대거 출석하는 검사들 사이에서 재판부는 흠결 없는 심리를 위해 매우 예민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임 전 차장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6부(윤종섭 부장판사)는 재판 진행 중 10여 차례 이상 재판장과 배석 판사 두 명이 말 그대로 '머리를 맞대고' 회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세 사람 이상의 법관이 합의해 재판의 내용을 결정하는 재판부'가 합의부의 사전적 정의지만, 실제 재판정에서는 재판장이 혼자 심리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윤 부장판사는 검찰과 변호인 양측이 이의를 제기하면 수시로 배석판사들과 회의하고 증인신문 중에도 절차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사항에는 적극적으로 소송지휘를 했다. 증인이 검찰에서 진술했던 증거자료를 대충 훑어보고 "제대로 작성된 것을 확인했다"고 답변하자 재판부는 "(자리에서) 다 열람해달라"고 지적했다. 이에 정 부장판사는 검사에게 엄지손가락 골무를 빌려 끼고 일일이 서류를 넘겨봤다.

증인신문 시작에 앞서 용어사용에 주의를 당부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증언을 하면서 관련자들을 지칭할 필요가 있을 경우 종전 직위 자체만을 사용하라"며 "'대법원장님', '차장님' 등 경칭을 사용하는 경우 맥락에 따라서는 그것이 기존의 존경의 의미를 넘어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외에도 "증인에게 문서를 제시할 때는 첫 페이지만 하지 말고 뒷장까지 하라", "증거 채택 안된 참고자료를 증인에게 보여주는 것은 안된다. 기억 환기를 위해서라면 질문을 통해 해라" 등 매우 꼼꼼하게 소송을 지휘했다. 피고인의 긴 구두변론과 중간에 튀어 나오는 검찰에 대한 비아냥이나 비난도 심한 수준이 아닐 경우 제지하지 않고 듣고 있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사실 '보통 재판'이 어디있겠냐"며 "대부분의 사람에게 재판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인데 법관들이 피고인과 증인으로 등장하고 나서야 원칙이 구현되는 모습이 씁쓸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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