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최후까지 광주시민 지킨 두 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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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5.18 광주민주화 운동때 광주시민들의 마지막 항거 장소였던 옛 전남도청을 지키다 숨진 두 신학생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양심에 따라 광주시민들을 생명을 살리기 위해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아 있어았습니다.유영혁 기자가 보도합니다.

[기자]

5.18 광주민주화 운동의 중심지였던 금남로 입구에 있는 옛 전남도청.

5.18 당시 전남도청의 지하실에는 8톤 트럭 분량의 다이너마이트와 수류탄, 자동소총 등이 쌓여 있는 무기고였습니다.

호남신학대학교 4학년이었던 문용동 전도사는 계엄군이 투항명령을 내렸던 5월 27일 새벽까지 남아 다이나마이트의 뇌관과 수류탄의 공이 제거작업을 했습니다.

전남도청에 쌓여있던 폭약이 폭발했다면 반경 3km안의 건물이 모두 파괴됐을 정도의 양입니다.

문용동 전도사는 계엄군이 투항명령을 내리기 전날 부모와 친구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도청 지하실로 갔습니다.

[인터뷰]
(윤상현 목사/고 문용동 전도사 호신대 동기)
"나와라 오늘 저녁은 위험하다신학도로서 도저히 신앙을 가지고 이 사실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나갈수가 있겠느냐 죽으면 죽으리라 그 말 한마디 하고 들어갔습니다."

문용동 전도사는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장악하기 위해 작전을 펼쳤던 5월 27일 새벽까지 도청지하실 무기고에 생존했던 두 명중 한명으로 계엄군이 쏜 총탄에 맞아 숨졌습니다.

[인터뷰]
(김영복 집사/광주서석교회)
"마지막 27일 진압한 날 새벽 동이 다 트고 헬기에서 투항하라 했었는데 맨 마지막에 둘이 살아남아 있었거든요. 제 바로 앞에 문 전도사가 가고 제가 그 뒤를 따라 갔었죠 문열고 막 나가는데 위에서 총상으로 해서 사살해서 제 앞에서 유명을 달리했죠. 제가 살아있는 것이 좀 죄스럽죠"

5.18 당시 한국신학대생이었던 류동운 전도사.

류동운 전도사는 광주 신광성결교회 류연창 목사의 아들로 성결교회 교인이면서도 기독교장로회 총회소속의 한신대학을 갔습니다.

박정희 정권때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으로 보입니다.

[인터뷰]
(배창희 교수/광주 남부대/고 류동운 전도사의 교회 후배)
"유연창 목사님은 성결교회 목사 하시면서 사회에 대한 관심이 많으셨죠"
"그런부분을 뛰어넘기 위해서 기장인 한신대로 지원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류동운 전도사는 5.18때 광주로 내려간 뒤 선배의 죽음을 목격하고 시위대에 합류했습니다.

[인터뷰]
(배창희 교수/광주 남부대)
"도청안에서 시신수습하고 (행방불명자) 접수받는 일을 앞장서서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류동운 전도사도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다 계엄군이 쏜 총탄에 맞아 숨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류동운 전도사의 시신은 계엄군이 도청을 장악하고 난 뒤 한참뒤에 발견됐습니다.

[인터뷰]
(김영태 전남대 명예교수/고 류동운 열사 고등부때 전도사)
"어렸을 때 보면 굉장히 심신이 우선 건강했다 마음도 건강하고 몸도 건강하고 거기에 아버지의 신앙을 받아서 영성이 강했던 그런 제자로 기억이 됩니다. 제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은 아버지가 삽으로 흙을 세 번 뜨시고 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동운아 너 참 장하다"

5.18 광주민주화운동때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에 남았던 두 신학생은 자신들의 신앙양심에 따른 삶을 살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희생됐습니다.

[영상취재 이정우, 정용현 영상편집 전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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