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벌새', 그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알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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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 리뷰]

'벌새'에서 주인공 은희 역을 맡은 배우 박지후 (사진=에피파니&매스 오너먼트 제공)

 

※ 영화 '벌새' 내용이 나옵니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 굳이 다른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한국 사회를 사는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교육열이 높고, 실제로 학생들의 학업 수준도 타 지역보다 훨씬 앞서 있는 곳. 학원이나 고액 과외를 시킬 정도로 어느 정도의 재력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

여성 청소년도 마찬가지다. 모범생 혹은 비행 청소년.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듯한 순수함과 순진함 혹은 어른을 찜쪄먹을 정도의 영리함. 어떤 것이든 실제로는 전체의 소수나 일부에 불과할 것 같은 특징이, 영화 속에서는 꽤 자주 재현돼 왔다. 거론한 것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아이들의 자리는 없는 듯 보였다.

영화 '벌새'(감독 김보라)는 1994년을 사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중학생 소녀 은희(박지후 분)의 이야기를 그린다. 은희 자신과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집중하기에, 언뜻 한 개인의 이야기로 보이지만 그보다 더 넓은 세계를 보여준다. 마치 그때의 풍경, 냄새, 소리까지 통째로 스크린에 담은 듯 생생하다.

연노랑 베네통 백팩을 멘 은희는 수업 시간에 딴짓을 곧잘 하고 자주 자는 아이다. 영어 교과서 본문을 매끄럽게 읽지 못해 비웃음을 듣지만 개의치 않는다. 좋아하는 건 확실하다. 만화 그리기와 남자친구 지완(정윤서 분). 하지만 부모도, 선생도 은희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아빠(정인기 분)와 엄마(이승연 분)는 공부 잘하는 아들 대훈(손상연 분)의 외고 입시에만 온 정신을 쏟는다. 첫째 수희(박수연 분)가 열외가 된 지는 오래다. 대치동에 살면서 공부를 못해 "강북에 있는 학교나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집안 서열도 명백하다. 아빠 다음은 둘째 아들 대훈이다.

그런 은희에게 동네 한문 교실 선생님으로 온 휴학생 영지(김새벽 분)는 금세 새롭고 특별한 사람이 된다. 당연한 듯 학생들에게 반말하고 그들이 따라오든 말든 진도를 나가는 여타 선생님과 달리 자기소개를 시키고, 본인 소개도 하고, 과장된 호의를 보이지 않지만 있는 그대로 존중하기에.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은희는, 어른들이 흔히 말하는 '좋을 때'를 지나고 있지만 그 시기가 마냥 맘 편하고 좋지만은 않다. 공부 스트레스를 동생에게 푸는 듯 보이는 오빠는 성질이 나면 곧잘 은희를 폭행한다. 심지어 아빠가 보는 앞에서도 뺨을 때린다. 손찌검이 얼마나 일상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벌새'는 은희의 아주 보편적이고 가장 찬란한 이야기다. (사진=에피파니&매스 오너먼트 제공)

 

전부였던 지완은 다른 여자애랑 시시덕거리는 모습을 들키고, 지숙(박서윤 분)과는 사이가 틀어져 "단짝 아닌" 시기를 보내고, 누구보다 자기가 더 좋다고 했던 유리에게는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라는 냉담한 이별 통보를 받는다. 갑자기 생긴 혹 때문에 입원도 한다.

영지는 '대치동에 살고 공부에 별로 소질 없는 중학생' 너머의 은희를 본다. 타인의 눈에는 아무 생각 없어 보이지만 세상이 정해놓은 '좋은 틀' 안에 자기가 속해있지 않다는 것을 명백히 알아 '내 삶도 언젠가 빛이 날까?' 하고 고민하는 은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래서 은희는 아주 친한 사이에서만 할 법한 내밀한 이야기를 영지에게 자꾸만 털어놓는다. 오빠가 때리면 빨리 그 시간이 끝나기를 바라고, 지숙이와는 왜 멀어졌으며, 사실 집보다 병원에 있을 때 더 편하다고. 떡이 맛있다는 칭찬에 '최고급 쌀'을 써서 그렇다는 tmi(too much information, 과잉된 정보)를 쏟아내기도 한다.

영지 또한 은희에게 세상에 '말도 안 되는 일'이 너무나 많이 일어난다는 것을, 함부로 사람을 동정해선 안 된다는 것을 일러준다. 자기가 너무 싫어질 때 어떻게 벗어나는지를 방법을 공유하고, 시시때때로 맞는 은희에게 절대로 가만있지 말고 맞서 싸우라고 조언한다. 무엇보다, 정말 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를 질문한다.

'벌새'에는 김일성 사망, 성수대교 붕괴 등의 큰 사건이 나온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그 시절의 1994년을 되살리는 것은 어쩌면 그보다 사소해 보이는, 자칫하면 지나쳤을 어떤 부분들이다.

좋은 성적과 명문 학교를 향한 집착, 중학교 교실에서 자연스레 일어나는 위계와 구분, 오빠에게 툭하면 맞는 여자아이들의 고통과 체념, 똑똑해도 여자라서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그 시절 엄마들, 비난의 근거가 되는 '동네 창피'의 여러 사례, 번듯한 위상의 대치동 근처에서 생존권을 위해 처절하게 싸운 이들의 흔적 같은.

그렇다고 '벌새'를 무겁기만 한 영화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정말 일상에서 튀어나온 듯한 상황과 대사로 관객에게 무방비 상태의 웃음을 선사한다. 대단한 의도 따윈 없고, 오히려 진심이었던 말속에 웃음이 스며있다.

29일 개봉, 상영시간 138분 46초, 15세 이상 관람가, 한국, 드라마.

극중 은희의 '본질'에 관심을 두고, 은희를 존중하는 유일한 어른은 영지다. 왼쪽부터 영지 역 김새벽, 은희 역 박지후 (사진=에피파니&매스 오너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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