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심리 공들여라" 미투 판결이 불러온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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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타 사건들처럼…성폭 사건도 '편견' 최대한 배제
진술뿐 아니라 평소 노동환경 등 사실심리 강화

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안 전 지사의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등 혐의에 대한 상고심 기각 결정 환영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대법원은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징역 3년 6개월 형을 확정 판결했다.(사진=이한형 기자)

 

2018년 본격적으로 제기된 '미투(Me Too)' 사건들의 재판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판결문으로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최근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수행비서 성폭력 사건에 대해 대법원은 유죄를 인정했고 동료 검사를 성추행한 후 부당하게 보직을 변경한 안태근 전 검찰국장에 대해서도 1·2심 모두 유죄가 선고됐다.

이러한 과정에서 판결문에 등장한 '성인지감수성'은 다소 논쟁적인 단어가 됐다. 대개 증거가 많지 않은 성폭력 사건에서 편리하게 피고인을 단죄할 수 있는 도구가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판결들에서 성인지감수성은 우려와는 반대로 고착화된 경험칙과 통념에서 벗어나 '사실 심리'를 더욱 충실히 하는 방향으로 적용되고 있다.

◇"성인지감수성, 경험칙·통념 배제하고 증거 보라는 것"

12일 법조계와 한국젠더법학회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4월 12일 대법원이 처음으로 '성인지감수성'을 언급한 후 올해 4월 말까지 1년간 총 67개 민·형사 판결에서 해당 단어가 언급됐다.

67개 판결 중 피고인에게 '무죄'가 선고된 것은 2건이었다. 성폭력 사건의 무고죄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무죄가 선고된 사건과 안희정 전 지사의 1심이었다. 결국 안 전 지사 1심을 제외하고 성인지감수성이 언급된 모든 판결에서 피해자에게 유리한 결과가 도출된 셈이다.

결과가 한쪽으로 쏠리자 일각에서는 '성인지감수성은 피해자에게 유리한 도깨비 방망이'라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법관이 피해자에게 온정적인 판결을 하기 위해 편리한 근거로 성인지감수성을 가져다 썼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지난 4월 열린 '미투 이후, 형사사법 패러다임의 변화' 학술대회에 참석한 한국젠더법학회 소속 법관과 연구자들은 성인지감수성은 '법관의 심증'을 오히려 배제하는 역할이라고 정리한 바 있다.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 청년정치공동체 너머 등 학생시민단체 회원들이 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3.8 여성의 날 기념 '#스쿨미투_성폭력의_역사를_끝내자'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사진=박종민 기자)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성폭력 사건 재판에서 성인지감수성의 관점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구축된 '피해자다움'의 통념에 대해 비판적·성찰적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안 전 지사 1심 재판부는 피해자인 수행비서가 안 전 지사에게 성추행을 당한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업무를 수행한 것이 '통상적인 피해자의 행동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판단은 지금까지의 사회통념에 기초한 것일뿐 별다른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성인지감수성은 이같은 '피해자다움'에 대한 잘못된 경험칙과 통념 때문에 법관이 피해자 진술과 여타 증거를 쉽게 배척해온 태도를 지적하고 더욱 사실 심리에 충실할 것을 요구한다.

대법원은 이번 안 전 지사 판결에서 "피해자 진술의 주요한 부분이 일관적이라면 진술의 증명력을 특별한 이유 없이 함부로 배척해서는 안된다"고 못 박았다.

◇자연인 남녀 아닌 권력의 문제…"위력 현장 살펴야"

대법원은 또 "위력으로써 간음했는지 여부는 위력을 행사한 사람의 지위나 권세의 종류, 피해자의 연령, 행위자와 피해자의 이전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해자 진술 신빙성뿐 아니라 성폭력이 일어난 현장을 살필 때에도 성인지감수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는 취지다.

많은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자는 피해자와 연인 사이였다고 주장한다. 이는 두 사람의 배경이 배제된 자연인 상태의 대등한 관계임을 의미한다. 대개 가해자는 그 증거로 두 사람이 주고받은 메시지나 주변인이 목격한 정황 등을 제시하고 법원은 이를 큰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여 왔다.

프레스센터에서 미투와 함께하는 시민행동 등 시민사회단체 주최로 열린 '위력에 의한 성폭력, 판단기준은 무엇인가' 토론회 참가자들이 발언을 하고 있다.(사진=황진환 기자/자료사진)

 

성인지감수성은 그러한 정황 증거보다 강한 '고정된 증거'를 먼저 살피라고 주문한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갑·을의 관계였는지, 권력 차이가 얼마나 컸는지, 각자의 노동조건·환경이 어떠했는지 등이다. 이는 성폭력 사건에서만 적용되는 특례가 아니라 사기나 횡령, 배임 등 확실한 물증 없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은 사건들에서 당연히 적용되는 원칙이다.

안 전 지사는 재판 과정에서 '합의된 성관계'였다는 점을 피해자와의 메신저 대화 내용과 피해자의 태도 등으로 주장해 왔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성관계에 관한 명시적인 합의가 있었다고 볼 만한 자료가 없다"며 "간음행위 전 피해자가 피고인에 대해 이성적 관심을 가졌다거나 연모해왔다고 볼만한 자료도 없다"고 안 전 지사가 제시한 증거를 모두 배척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앞으로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 '고정값'의 차이가 분명할수록 법관은 양자간 '호감'을 제한적으로 인식할 것"이라며 "가해자는 애정관계였다는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더 높은 증명력을 가진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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