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곶자왈'에서 만난 '마녀'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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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숙 아라리오 갤러리 개인전 '그림자의 눈물'

박영숙. '그림자의 눈물 3'. 2019, 180x240cm.(사진=아라리오갤러리)

 

깊은 숲 속에 펼쳐진 하이얀 보자기.
그 위엔 저 멀리 바다 건너 온 국제편지 봉투들.

숲 속에 놓여진 오래된 카메라 몇 개.
마치 중세 시대를 담은 듯한 흑백 사진이 담긴 액자들.

수풀 가운데 아기자기 옹기종기 놓여진 파우더와 립스틱.

나무 위에 매달린 백색의 큰 천.
옷걸이에 걸린 하이얀 웨딩드레스.

낮게 드리워진 나뭇가지에 오종종하게 올려앉은 바늘꽂이.

유리병에 담긴 색색의 유리구슬들...


중세 시대 마녀가 유럽을 탈출해 다다른 곳은 바로 제주 '곶자왈'이었다.

배 타고 먼 길을 떠난 마녀가 이 곳에 도착해 살림을 차렸다.

숲 속 곳곳이 마녀의 활동 무대.

박영숙. '그림자의 눈물 16'. 2019, 180x240cm.(사진=아라리오갤러리)

 


곶자왈은 '가시덤불 숲'의 제주 방언이다. 말 그대로 가시나무 넝쿨이 어지럽게 엉킨 쓸모없는 땅이다. 이 곳엔 웨딩드레스, 어머니 사진, 아버지에게 받은 카메라 등 작가의 추억이 담긴 물건부터 립스틱, 실과 바늘꽂이, 장난감 등 각종 소품까지 다양하다.

울창한 숲속, 그늘이 우거진 음산함과 신비로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공간, 누군가 여기 살았음을 보여주는 소품들.

마녀가 사유하는 방법을 나타내는 소품들이 시대에 따라 변한 것을 보여준다. 작가의 개인 소장품부터 작가 친구의 어머니께서 쓰시던 가방 등 여러가지 소품들이 눈길을 끈다. 작가는 이를 '마녀의 흔적'이라고 표현했다. 중세시대 유럽에서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한 마녀들, 혹은 마녀처럼 억울하게 사회에서 배제된 여성들의 존재를 끄집어내, 버려진 땅에서 마녀라는 '버려진 여자'들이 있었던 풍경을 상상하고 포착했다.

전시장인 서울 소격동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개인 사진전 '그림자의 눈물'을 열고 있는 1세대 페미니즘 사진작가 박영숙(79)을 만났다. 보라색 짧은 커트 머리에 경쾌한 뿔테 안경, 팔순 가까운 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혈기왕성한 모습의 작가는 특별한 일 빼고는 거의 매일 전시장을 지키고 있다고 전했다.

박영숙 작가는 "중세 시대 주체적으로 사유했었던 한 여성이 그 시대적 상황에서 마녀로 몰려 화형을 피하려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었고 표류하다가 도착한 곳이 제주였을 것"이라며 "수풀 자갈이 많아 농사를 못 지어 버려진 땅, 곶자왈에 버려진 사람이 도착해 본향은 아니지만 여기서 살아날 수 있었을 장소라고 상상했다"고 말했다.

막연하게 작업에 사용하기 위해 여러 물건을 모으던 작가는 곶자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이 소품들이 여성의 자리를 채운 풍경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여름과 겨울은 촬영이 어려워 2017년부터 2019년까지 몇 차례씩 한 달에 이틀 정도씩을 머물며 촬영했다. 제주와 서울을 오가며 3년여의 작업 기간을 거쳤다.

박영숙. '그림자의 눈물 6'. 2019, 180x240cm.(사진=아라리오갤러리)

 


박 작가는 "어쩌면 마녀 작업은 무의식 속에서 오랫동안 준비하던,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며 "마녀들이 살았을 것 같은 흔적이 가슴으로 기억되길 바란다"라고 했다. 이어 "여전히 나는 페미니스트이고 그 정체성을 떠날 이유가 없다"라며 "내 안에 여전히 마녀성이 있고, 마녀라는 이름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것을 용서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박 작가는 제목부터 강렬한 대표작 '미친년 프로젝트' 등을 통해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적 사회를 비판하는 작업을 펼쳐왔다.

전시는 6월 13일까지 열린다.

'그림자의 눈물' 개인전을 열고 있는 박영숙 작가 (사진=아라리오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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