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경북 경주박물관에서 정상회담장으로 이동하며 대화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한미 관세·안보 협상 결과가 담긴 공동 설명자료(팩트시트) 발표 시점이 예상보다 미뤄지는 배경으로 한국의 원자력 추진 잠수함(원잠) 건조 장소 문제가 지목되고 있는 가운데,
한국과 미국 현지에서 각각 한국용·미국용 원잠을 병행 건조하는 게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건조 장소로 언급한 미국 필라델피아 한화필리조선소에서는 미국용 대형 원잠 건조를 추진하고, 국내에서는 한국형 원잠을 만드는 방식의 전략적 협력으로 양국이 접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취지다.
"한국 원잠은 한국에서 만들어야" 정부 원칙에 전문가들도 "맞아"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경주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원잠 운영을 위한 연료 공급을 요구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한국의 숙원이었던 원잠 확보가 가시화 됐다. 해당 회담을 계기로 한미 관세 후속 합의도 이뤄지면서 양국의 동의 내용을 담은 관세·안보 팩트시트와 대미투자 MOU(양해각서)도 속도감 있게 발표될 것으로 예상됐지만, 안보 문제를 둘러싼 조율이 장기화 되는 모양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직후 SNS를 통해 한국의 원잠 건조를 승인했음을 알리며 "필라델피아 조선소(필리조선소)에서 건조할 것"이라고 밝혔다. 필리조선소는 한미 관세 협상 국면에서 돌파구로 작용한 양국 조선협력 '마스가'(MASGA) 프로젝트의 상징으로 부각된 곳으로, 지난해 말 한화오션(40%)과 한화시스템(60%)이 약 1억 달러를 투자해 인수한 조선소다.
그러나 이후 위성락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은 "한국에서 (원잠을) 만드는 방안을 추진하려 한다"며 "미국 필라델피아 조선소(필리조선소) 잠수함 시설에 투자를 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원잠 건조 장소를 둘러싼 한미 간 이견이 팩트시트 발표 연기의 배경으로 지목된 이유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한국의 원잠을 미국에서 건조하는 건 비효율적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노무현 정부 때 초대 핵추진 잠수함 사업단장을 지낸 문근식 한양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는 12일 CBS노컷뉴스와 통화에서 "필리조선소에는 원잠을 만들 시설이 없다. 반면 국내에서는 원잠을 만들기 위한 기본 설계가 내년 말이면 끝난다"며 "필리조선소에 한국용 원잠을 만드는 투자를 하는 건 이중투자나 다름없다"고 평가했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석좌연구위원도 통화에서 "미국에서 원잠을 만들어야 한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의도는 자국 조선업 부흥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그러나 현실적으로 필리조선소에서 한국 원잠을 만드는 건 비효율적이고, 실현 가능성도 낮다"고 했다.
'필리조선소서 미국용 버지니아급 원잠 건조' 병행 대안론 부각
미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의 한화필리조선소. 연합뉴스다만 이 문제를 둘러싸고 양국이 해법을 찾기 어렵다면,
필리조선소에서는 미국용 원잠을 만들고 국내에서는 한국용 원잠을 병행 건조하는 방안이 돌파구가 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미국이 잠수함 건조에 허덕이는 상황인 만큼,
필리조선소에서 미 해군 주력인 버지니아급(7800톤급) 원잠 건조 사업을 수주하면 한미 모두에게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지렛대 삼으면 국내에서 한국용 원잠 건조도 미국발 정책적 불확실성에서 벗어나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는 게 '한미 원잠 병행 건조론'의 골자다.
문근식 교수도 이에 대해 "한국용 원잠은 한국에서 만든다는 원칙에서 물러서면 안 된다"며 "차선책으로 필리조선소에서는 미국용 버지니아급 잠수함의 건조를 도와줌으로써 한국용 원잠의 국내 건조에 대해서는 개입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미국에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필리조선소를 미국용 원잠 수주기지로 삼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시설과 인력이 필요한데, 1500억달러 규모의 조선업 협력 펀드 조성에 한미가 합의한 만큼 이를 활용하면 현실화 시나리오를 모색할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병행 건조론과 맞물려 제기된다.
필리조선소의 원잠 건조 가능성과 관련해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은 10일(현지시간) 한화 측이 향후 10년 내로 미국에서 매년 2~3척의 원잠을 만든다는 내부 계획을 갖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해당 원잠이 미국용인지 여부는 보도에서 설명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한화 측은 "구체적 계획은 수립돼 있지 않다"면서도 "원잠 관련 투자도 병행된다면 10년 후 원잠 건조를 위한 인프라도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필리조선소에서의 원잠 건조가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라는 것이다. 한화는 지난 8월에는 필리조선소에 마스가 펀드를 활용한 50억달러 규모의 추가 투자를 통해 연간 1~1.5척 수준인 선박 건조능력을 20척까지 확대할 것이라는 목표도 제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