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흔적들은 바로 우리 곁에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생활로 들어와 우리와 서울살이를 함께 해왔다. 6.25 전쟁과 냉전의 흔적을 찾아, 굳이 비무장지대, 철원, 백령도로 떠나거나 전쟁기념관을 방문할 필요가 없는 이유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산재해있는 전쟁과 남북대립의 흔적들. 우리 곁에 늘 있었지만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전쟁과 냉전의 자취를 함께 따라가보자.
◈ 남산 1,2호 터널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포함한 북파 공작원 31명이 청와대 바로 뒤편까지 침입해서 총격전을 벌였던 1.21 사태. 온 나라를 충격에 빠뜨리고 남한 사회를 본격적인 병영국가로 전환시킨 계기가 된 1.21 사태는 서울 도시공간변화에 있어서 미국의 9.11 사태와 같은 중대한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강남 개발이 본격화된 것도, 남산요새화계획이 마련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게다가 그해 11월 2일에는 삼척 울진 무장공비사건이 벌어졌다. 북한의 대규모 남침이 언제라도 재현될 수 있다는 불안감은 더 번져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9년 신년사에서 1969년을 ‘싸우며 건설하는 해’로 표방하며 북한의 위협에 구체적으로 대응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그 일환으로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은 1월 17일 ‘서울요새화계획’을 발표하고, 3월 4일에 그 구체적인 실천방안으로 ‘남산요새화계획’을 내놓았다.
남산요새화계획의 핵심은, 1970년말까지 전쟁시 30~40만명이 대피할 수 있는 지하수용시설을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남산 1,2호 터널이었다.
교통망의 역할보다 전쟁을 염두에 둔 방공호 목적으로 만들어진 남산 1,2호 터널. 이 가운데 남산 1호 터널은 지금 한남대교와 경부고속도로로 이어지는 중추적인 교통 기능을 담당하게 됐지만, 이태원동에서 장충체육관 앞길로 이어지는 남산 2호 터널은 여전히 교통 수요가 적은 어색한 터널로 남아있다.
남산 3호 터널은 방공호를 목적으로 만든 남산 1,2호 터널과는 달리, 강남 개발을 위한 강남고속버스터미널 건설 후 접근성 편의를 위해 만든 터널로, 서울 강북 도심에서 용산과 반포대교로 이어지는 주요 교통망의 기능을 지금까지 맡아오고 있다.
◈ 서울 도심 지하상가
6.25 전쟁 때 단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당했던 치욕을 기억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전쟁 재발 시 수도 서울을 사수해낸다는 확고한 목표를 갖고 있었고, 이를 위해 서울시민들의 대규모 대피시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남산 터널 방공호만으로는 부족했다.
도심에 집중 건설된 지하상가들이 그래서 생겨났다. 1970년대 서울 도심에 만들어진 을지로, 회현, 동대문 등 지하상가 공간은 애초 전쟁을 대비해 서울시민의 방공호 용도로 조성된 것이었다.
단순한 시민의 대피뿐 아니라, 수도 서울 사수를 위해 서울시청 대피도 감안한 것이 시청역에서 을지로6가까지 이어지는 을지로 지하상가였다. 비상시 서울시청을 이곳 지하로 옮겨 한두달은 버틸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후 도심 재개발이 이뤄지면서 지상의 상권이 지하로 흘러들어왔고, 이들 지하상가는 지금까지 30여년의 전통과 특색을 간직한 시장으로 자리매김했다.
◈ 남산 서울타워
남산 정상에 서 있는 236.7m 높이, 해발 479m의 서울타워. 기공식이 거행된 1969년 12월 3일 당시 이 타워는 해발 높이를 기준으로, 동양 최고의 탑으로 알려진 도쿄타워(333m)나 파리의 에펠탑(315m)보다도 훨씬 높은 탑이었다.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이었던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교수는 이 탑을 만든 핵심 목적이 북한으로부터의 전파 방해 행위를 저지하는 한편, 북한에서 송신되는 전파를 방해하려는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이 탑이 완성되기 전에는 서울 북부지역인 구파발과 불광동 등지에서는 북한의 TV 방송을 시청할 수 있었고, 시내 어디에서도 북한 라디오방송을 청취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북한 관련 전파를 차단하는 업무를 중심으로 당시 KBS, MBC, TBC 3개 TV 송신탑으로도 기능했던 것이 남산 서울타워였다.
훗날 남산제모습찾기 100인 위원회에서 일부 위원들에 의해 철거 문제까지 거론됐던 남산 서울타워. 그러나 지금 서울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서울의 대표 랜드마크로 자리잡았다. (서울도시계획이야기.5 - 서울 격동의 50년과 나의 증언 /한정목 저 / 출판 한울 / 2003 참조)
◈ 북악 스카이웨이
1.21 사태는, 북파 공작원이 북에서 청와대까지 산길을 따라 한번의 제지도 없이 침투해들어올 수 있다는 두려움을 안겨줬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북악스카이웨이.
1.21 사태 직후인 2월 9일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은 ‘방어 및 관광 목적의 스카이웨이’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에 찻길을 만들고 검문을 통과한 차량의 통행을 유도해 은밀한 산길 침투의 재발 가능성을 차단하려 한 것이다.
서울 미아리-정릉-북악산-자하문을 연결하는 북악스카이웨이는 1.21 사태의 정확히 한달 뒤인 1968년 2월 21일 착공돼서 9km의 도로가 9월 28일에 개통됐다. 지금은 서울 도심 야경을 감상하는 대표 조망지가 된 북악스카이웨이와 팔각정 도로이지만, 그 태생은 남북 대립과 청와대 주변 방위 체제 재정비의 산물이었다.
◈ 반포 잠수교
한강 다리들도 전쟁 상황을 감안한 군사전략적 입장에서 설계된 경우가 많았다. 한강의 경관을 해친다는 평가를 받던 다리들은 대부분 이런 경우인데, 폭격으로 피해를 입었을 때 가장 빨리 효과적으로 복구할 수 있는 구조를 선택한 결과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반포대교의 잠수교다. 잠수교는 폭격을 피할 뿐 아니라 파괴 후 빨리 복구가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지어진 대표적인 다리다. 반포대교 아래 건설돼 공중에서 보이지 않고, 교각이 짧아 폭격을 받으면 상판을 빨리 다시 깔 수 있었다.
◈ 여의도 광장
길이 1350m, 넓이 40만㎡에 이르는 ‘5.16 광장’이 여의도에 만들어진 것은 1971년.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군사용 비행장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71년 2월 20일 시작해 그해 9월 29일 완공됐다. 완공 이틀 뒤인 10월 1일 학생과 군인 30만명을 모아 이곳에서 '국군의 날' 행사를 열었다. 그 후 5.16 광장의 이름이 여의도 광장으로, 그리고 그 후엔 여의도 공원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 유진상가
1970년에 지어진, 서울에 얼마 안 남은 상가아파트 ‘유진상가’.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에 자리한 유진상가는 다른 상가아파트들과 구별되는 또 다른 용도가 있었으니 그것은 군사적 방어 기능이다.
휴전선에서 서울로 통하는 주요 도로에 방어선이 구축됐는데, 서울 도심에서 가장 가까운 방어선이 구파발의 전차방어선이었다. 구파발 방어선을 돌파한 북한 전차 부대가 청와대나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방면으로 진출하려면 반드시 유진상가가 있는 홍은동 네거리를 거쳐야 했다. 수도 서울 방어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북한 전차의 기동을 저지·지연하려고 만들어진 건물답게 유진상가는 기둥과 상판뿐 아니라 외벽까지 견고한 철근콘크리트로 축조됐다. 1층은 기둥만 서 있고 2층부터 방을 짓는 방식, 즉 필로티 방식으로 지어진 것도 대전차 방호시설로서의 군사적 설계다.
아군의 기갑차량 엄폐 기능과 함께, 적군의 기갑차량이 진입했을 때 1층 기둥을 폭파해 상부의 아파트 건물이 도로를 덮치도록 하는, 적군 전차 기동 차단 목적 설계라는 설명이다.
유진상가 아파트동 전체가 초대형 낙석 구실을 하도록 설계됐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유진상가는 ‘싸우면서 건설하자’라는 정권의 구호가 구체적으로 표현된 준전시 체제의 상징물이었다.
그랬던 유진상가였지만 한반도 냉전이 완화되자 전술적 가치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한때 수도 서울 방위 전략 건물이자 강남 타워팰리스식 주상복합의 선두격이었던 유진상가는 이제는 그 효용을 다한 채 철거를 기다리고 있다. (“유진상가, 비루하고 데데한 유신 건축물의 비애” [한겨레 21. 2012.09.10 제927호] 참조)
◈ 총격전으로 인한 도심 속 총탄의 흔적들 - 숭례문·서울역·북악산·1.21사태 소나무
6.25 전쟁 당시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총격전”의 흔적을 우리는 서울 도심을 대표하는 건축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숭례문과 舊 서울역을 가보자. 우리 역사의 풍랑을 고스란히 겪어온 숭례문은 6.25 전쟁의 상처도 석축에 품고 있다. 숭례문 석축에 나 있는 수십개의 총탄 자국들을 지금 숭례문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구 서울역, 지금은 ‘문화역 서울 284’라는 문화전시공간으로 바뀐 곳에서도 구 서울역의 총탄 자국을 보존해서 전시하고 있다.
6.25 전쟁의 상처뿐 아니라 정전 이후 냉전 상황에서 터진 1.21 사태의 총격전 총탄 자국도 지금 만나볼 수 있다. 북악산 서울성곽에 진입하면 만나는 1.21 사태 소나무가 그것.
북파 공작원과 우리 군경과의 총격전 속에서 15발의 총탄이 소나무를 뚫거나 할퀴었고, 그 자국이 지금도 소나무에 남아 이곳을 찾는 시민들 앞에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증언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곳 외에도, 수도 서울 도심 한복판에는 수많은 전쟁과 냉전의 자취들이 숨어있다.
2004년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문화재청 국정감사에서 천영세 민주노동당 의원은 “서울 창덕궁 내 방공진지 등 전국 문화재 구역 안에 설치된 군사시설이 8곳, 41만㎡에 달한다”고 밝힌 바 있다.
6.25 전쟁으로 갈 곳 잃은 월남 피난민들이 남산 남서측 산록에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해방촌”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이들 월남 피난민들이 동대문에서 봉제업으로 시장을 만들고 지은 이름이 ‘평화통일’을 기원한다는 뜻의 동대문 “평화시장”이다.
세계에 유례를 찾기 힘든 미국 대사관과 군 시설 입지도 6.25 전쟁과 내전에서 비롯된 독특한 현상이다. 수도 도심 한복판 국가 중심 도로에 자리한 미 대사관과 경복궁 옆에 담장을 치고 들어앉은 미 대사관 직원 숙소, 그리고 서울의 중앙인 용산에 자리한 미군 기지가 그것.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수도 한복판의 미군 주둔과 국가 중심 도로 대사관 시설 배치는, 북한군이 남침하면 미군과 붙을 수밖에 없고 그러면 자연히 미국이 개입하도록 하는 이른바 ‘인계철선’의 전략이었다.
폭우 산사태 때 시민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서울 강남의 우면산 지뢰지대도 전쟁의 현재진행형 흔적이다. 전국에 걸쳐 지뢰가 묻힌 면적은 여의도의 10배가 넘고, 전후 사상자만 2천명 이상이다.
이렇게 수도 서울의 도심 한복판에는 우리 전쟁과 냉전의 역사가 오롯이 투영돼 있다. 6월이 가기 전에 이곳을 걸으면서 혹은 늘 보고 지나던 것을 다시금 새롭게 바라보면서, 한반도 냉전의 아픔과 평화의 중요성을 되새겨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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