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년 12월 12일 저녁 6시경. 경복궁 내밀한 곳, 신무문 바로 앞에 자리잡은 30경비단 단장실에 군 요직을 맡은 장성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해 차규헌 수도군단장,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 황영시 1군단장, 노태우 9사단장, 박준병 20사단장,박희도 1공수여단장등이다.
이들은 심각한 모습으로 대책을 숙의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굳이 30경비단을 택한 이유는 상대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인데다, 첨단 통신설비까지 갖춰져 있어, 어느 부대와도 연락이 가능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30경비단에 모인 하나회 군인들은 대통령의 재가도 없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하고, 사실상 군을 장악했다.
이후 신군부세력은 청와대와 맞닿아 있는 신무문을 통해 청와대를 드나들며, 최규하 대통령을 압박해 결국 권력을 찬탈했다.
군부 반란의 산실이 된 30경비단의 출범 또한 군부쿠데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5.16 군사쿠데타를 성공시킨 군부세력은 30사단 1개대대를 서울로 불러 경복궁에 주둔시켰고, 이후 이 부대는 그대로 눌러앉아 수경사 30대대로 이름을 바꿔 청와대 경비를 전담했다.
차지철 경호실장 시절 30경비단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75년부터 매주 금요일마다 경호실 연병장에는 거물급 당간부, 부총리를 비롯한 장관들, 심지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까지 들러리로 세워진 채 열병,분열식이 진행되기도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이종구 전 국방장관, 고명승 전 보안사령관, 장세동 안기부장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군 핵심멤버들이 30경비단장을 거쳐갔고, 가장 확실한 출세코스였다.
96년 김영삼 대통령이 30경비단을 서대문구 현저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30경비단은 군사문화의 상징처럼 존재했다.
▲장면 #2 1519년 11월 15일 중종의 친위쿠데타
중종 14년(1519년), 11월 15일 밤. 음기가 들어온다고 여겨져 좀처럼 열리지 않던 경복궁 북쪽 신구문이 조용히 열렸다.
궁궐의 열쇠는 보통 승정원에서 관리했지만, 평소에 늘 문을 닫아두었던 신무문의 열쇠는 내시들이 관리를 했다.
왕의 내락을 받은 심정, 남곤의 훈구파들은 내시가 열어놓은 신무문을 통해 들어와 궁궐을 점령했다.
이른 바 중종의 친위쿠데타. 기묘사화의 시작이다.
위훈삭제 사건으로 한차례 홍역을 치른 훈구파에게 사림파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위험요소이자 반드시 없애야 할 제거대상이었다.
‘주초위왕’이라는 해괴한 사건을 조작한 훈구파들은 결국 개혁에 나선 조광조와 사림파에게 권력을 장악하고 분당을 조장했다는 죄를 물어 유배를 보낸 뒤 모조리 사사하거나 사형시켰다.
신무문을 통해 권력을 다시 잡은 훈구세력들은 백성들이 열망한 개혁의 물줄기를 되돌려놓았다.
신무문은 경복궁을 창건할 당시에는 없었지만, 태종때 세워진 문이다. 신무문이라는 이름은 성종때 지어진 이름이다.
임진왜란때 소실된 것을 고종이 재건했고, 건춘문과 함께 원형이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보전돼 있다. 명성왕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당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아관파천을 위해 궁을 빠져나갈 때 이용했던 문이 바로 신무문이다.
연관된 역사가 그리 밝지만은 않다.
청와대 보안과 경호를 이유로 굳게 닫혀있던 신무문이 다시 열린것은 2006년 10월, 노무현 대통령 시절이다. 군부대가 철수한 이후 복원작업을 거쳐 일반에 공개됐다.
과감한 개혁정치에 나섰다가 결국 훈구세력에게 목숨을 잃은 조광조와 권위주의를 벗어던지고 국정개혁을 시도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교묘하게 오버랩 된다.
최근 다시 불붙고 있는 이념논쟁을 보면서, 개혁과 변화가 얼마나 지난하고 힘든 일인지 새삼 깨닫게된다.
5백년 넘는 긴 시간동안 권부의 흥망성쇠를 묵묵히 지켜본 신무문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