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투자업계 등에 따르면 전씨는 지난 1993년 8월 금융실명제 시행 이후 비자금을 관리하는 수단으로 주로 무기명 채권을 이용했다.
무기명 채권은 말 그대로 돈을 요구하는 채권자가 누구인지 표시되지 않는 채권으로 이른바 '묻지마 채권'으로 불린다.
무기명 채권의 시작은 외환위기가 불거진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돈 가뭄에 시달린 정부는 고용안정채권(근로복지공단), 증권금융채권(증권금융), 중소기업구조조정채권(중소기업진흥공단) 등 무기명 채권 3종을 3조 7천 730억원 규모로 발행했다.
하나대투증권 채권상품부 관계자는 "외환위기 당시 달러가 부족해 국내에서 돈을 모아 달러를 사야 하는 상황이었다"며 "부자들로부터 돈을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무기명 채권을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채권자를 끌어모으기 위해서는 일종의 혜택이 필요했다.
익명성 보장은 무기명 채권의 최대 이점이었다.
중간 거래 과정을 추적하기가 쉽지 않아 뇌물이나 비자금 등 자금의 돈세탁 수단으로 악용됐던 이유다.
전씨는 퇴임 이후 5년간 장기신용채권과 산업은행채권 등 1천 400억원 어치의 무기명 채권을 사들인 것으로 알려진다.
현재 검찰은 만기가 지났는데도 현금화하지 못한 전씨 일가의 무기명 채권이 상당량 있을 것으로 보고 채권의 행방 찾기에 나섰다.
삼성그룹도 무기명 채권의 일종인 국민주택채권으로 비자금을 모아 2002년 대선자금으로 전달한 사실이 적발되기도 했다.
익명성과 함께 상속·증여세 면제 혜택은 무기명 채권에 매력을 더했다.
최근 횡령·배임 및 탈세 혐의로 구속 기소된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500억원대의 무기명 채권을 두 자녀에게 나눠줬다.
두 자녀는 세금을 내지 않고 받은 채권을 현금화해 그룹 지분을 사들이고 부동산 투자에도 사용했다.
양도성예금증서(CD) 역시 과거에는 무기명 채권과 함께 비자금 조성 수단의 '투톱'으로 꼽혔다.
CD는 은행이 정기예금에 양도 가능한 권리까지 부여해 발행하는 예금 증서로 무기명 상품이다.
정기예금의 만기가 짧아야 6개월 이상인 반면 CD는 만기가 30∼90일로 은행은 CD로 쉽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고 고객은 단기간에 현금화가 가능한 이점이 있다.
대부분 증권사가 매매중개(브로커) 역할을 맡는다.
또 CD는 만기 이전 개인 간 무기명 거래가 가능하므로 신분노출을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은밀한 자금의 돈세탁 수법으로 자주 이용됐다.
2003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현대그룹 비자금' 사건에 등장한 150억원 어치의 CD는 증권사와 보험사, 은행 등 금융기관을 통해 치밀한 돈세탁 과정을 거쳐 마련됐다.
다만 2006년부터 CD등록발행제가 도입되면서 무기명 특성이 사라짐에 따라 CD가 돈세탁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됐다.
CD를 주고받을 때마다 새로운 소유자는 증권예탁원에 실명을 신고해야 해 돈에 꼬리표가 붙게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