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대선 개입 비리에 대한 국회 국정조사특위는 진상 규명에 실패했다. 그러나 권은희 과장의 당당한 증언은 단연 돋보였다. 송파경찰서 홈페이지에는 권 과장을 응원하는 글과 함께 불이익을 걱정하는 글들이 올라 오고 있다.
내부 고발을 영어로는 휘슬 블로잉(whistle-blowing)이라 한다. 조직 내에서 불법비리 행위나 공공의 질서와 이익에 반하는 행위가 벌어지고 있을 때 이를 조직원이 고발 또는 신고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내부고발이 발생하는 배경은 다음과 같다.
1. 조직에 비리와 부조리가 발생했는데 문제를 해결할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다.
2. 옆 사람과 논의하고 상관과 논의해야 하나 커뮤니케이션 채널이 작동되지 않는다.
3. 최고 책임자마저도 해결 의지가 확실하지 못하다.
우리나라는 권위주의적 문화 속에 오래동안 머무르면서 조직의 문화도 페쇄적이고 통제 일변도였다. 따라서 내부고발이나 양심선언이 아주 드문 일이었으나 1990년 대부터 시작해 늘어나고 있다. 이는 민주화 이후 상명하복의 문화가 약해지고 시민사회의 지원이 강해진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일부 전문가들은 IMF 이후 구조조정.정리해고가 상시화되면서 평생직장이라는 의식이 엷어진 것도 이유로 꼽는다. 또 정보사회로 접어들어 조직의 고급정보에 조직원들이 접근하기 용이해 진 것도 내부고발이 늘어나는 이유로 꼽힌다.
◈ 진실은 죽지 않는다, 다만 쫓겨날 뿐이다?
우리나라의 공익적 양심선언 내지는 내부 고발의 역사도 1990년부터 본격화되었다. 대표적인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1990년 당시 감사원의 이문옥 감사관은 재별계열사 비업무용 부동산 보유비율이 위법한 수준인데도 업계로비로 감사가 중단된 것을 고발했다. 그러나 직무상 기밀누설죄로 구속되고 파면 당했다. 공정하고 투명해야 할 감사원이 비리를 눈감아주고 되려 양심선언자를 처벌한 충격적인 사건이다.
1990년에는 또 보안사령부에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가 김수환 추기경 등 민간 인사들을 불법사찰하고 있다고 고발하기도 했다. 윤석양 씨는 2년간 도피생활을 하다 체포됐다. 그리고 내부기밀유출죄도 아니고 허위사실 유포도 아니고 특수군무이탈죄로 처벌 받았다.
1998년 국방부가 각종 장비를 ‘비싸도 너무 비싸게’(?) 구입해 예산을 낭비하고 있다고 국방부 구매담당관이 언론에 고발했다. 국민혈세가 낭비되는 걸 막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으나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자 고발의 방법을 택한 것이다. 개선방안 보고서를 만들어 제출하고 청와대 민정수석실에도 사실을 알렸는데 돌아온 건 냉대와 수난뿐이었다. 고발 이후 도서실 책 정리 담당으로 발령 나기도 했다. 결국 감사원 감사가 이뤄지고 제도개선은 이뤄졌으나 비리자, 책임자들에 대해 처벌은 없었다. 왜? 다들 한통속이었을까?
2000년 용산 미 8군이 포름알데히드라는 독극물을 하수구를 통해 한강에 쏟아 부은 사실을 한국인 군무원이 폭로했다. 군무원은 계약연장이 불허됐다. 해고된 것이다. 영화 ‘괴물’의 소재가 된 사건이다.
◈ 인간의 양심은 운명보다 견고하다
이렇게 조직의 부조리에 맞선 내부 고발자들은 험난한 길을 걷는다. 기밀누설죄, 명예훼손, 무고죄로 법정에 서거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시달린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 양심적 내부 고발자는 조직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조직을 위해 고심한 것인데 왜 우리 사회는 격려보다 처단으로 쏠리는 것일까?
흔히 왕이나 독재자는 불만세력을 색출하기위해 밀고자 제도를 시행했다. 우리도 일제강점기, 군사독재를 거치면서 당국에 고발한다는 것을 마치 불순한 밀고처럼 여기게 된 것은 아닐까? 전문가들은 왕이나 독재자가 다스린 경험이 없는 신생국가인 미국 캐나다 호주 에서는 절대권력 독재권력을 경계하는 풍토가 먼저 뿌리를 내려 내부고발이 긍정적으로 여겨지는 걸 근거로 든다.
자신의 양심에 부끄럽지 않고자 공익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나선 사람들을 어찌 대하는가는 우리 사회의 도덕 수준을 반증하는 것이다. 선한 양심을 보호하지 못하는 사회가 어떤 미래를 가지게 될 지는 확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