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자가 사의를 표했을 때 사표가 수리되지 않는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다. 일을 더하라며 사표를 반려할 수 있는 데 이 때는 해당 공직자에 대한 신임의 표시이기도 해 힘이 더 실리기도 한다. 이런 저런 문제점 때문에 감찰이나 수사 또는 재판을 받을 경우에도 사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형이 확정됐을 경우 징계를 내려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연금 지급 액수 등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돈 문제는 아니겠지만 굳이 따지자면 청와대가 채 총장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갖고 있는 것은 후자에 가깝다. 고위 공직자 그 것도 검찰총수의 '혼외 자식설'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도 없었던 일이기 때문에 청와대가 '공직윤리'를 언급하면서 진상규명을 하겠다는 것은 '만능열쇠'가 된 '비정상의 정상화' 차원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청와대가 채 총장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고 쥐고 있는 것을 공작정치의 연장선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청와대는 혼외아들설 보도와 법무부 장관의 검찰총장 감찰 지시로 이어지는 공작설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며 강한 불쾌감을 나타내고 있지만, 법무장관의 검찰총장 감찰 지시는 권력의 속성상 청와대의 지시나 승인 또는 교감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법무장관의 검찰총장 감찰 지시는 강한 역풍을 불러왔다. 김윤성 대검 감찰과장이 감찰 지시에 거세게 반발하면 검찰을 떠나겠다고 밝혔고, 박은재 대검 국제미래기획단장은 검찰 내부 통신망에 '아니면 말고'식 감찰 지시를 비판하는 공개질의서를 띄웠다. 평검사들도 각 지방검찰청별로 평검사회의를 열 준비를 하고 있다.
야당도 강하게 반발했다. 국정원 개혁을 요구하며 장외투쟁을 벌였음에도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상황에서 고육지책으로 받아들인 대통령과 여야대표의 3자회담을 통해 국정권의 선거개입에 대한 유감표명과 국정권 개혁 약속을 받아내야 하지만 검찰총장 감찰지시가 정국의 핵으로 등장하면서 초점이 흐려졌다.
채 총장 혼외자식설에 대한 여론은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나랴"부터 청와대-국정원 기획설까기 분분하다. 하지만 검찰총장 감찰지시를 곱지 않게 보는 시선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와대가 채동욱 총장의 사표를 계속 쥐고 있으면서 진상규명을 하려는 것은 '믿져야 본전'이기 때문이다.
우선 채 총장은 혼외자식설 보도 이후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조선일보 보도가 사실로 드러나면 청와대의 사표 수리는 한 수 앞을 내다본 조치로 여론의 호응을 얻게 돼 있다. 반면 보도가 허위로 판명나더라도 감찰을 통해 채 총장의 누명을 벗겨주는 셈이어서 잃을 게 없다.
채 총장 의혹이 길어질수록 국정원 개혁, 경제민주화와 직결되는 상법 개정, 일감몰아주기 규제법안 등 정권으로서는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는 핵심 현안에 대한 관심을 분산시킬 수 있다. 이미 시작된 정기국회가 박근혜정부 첫 국정감사지만 지난 6개월에 대한 야당의 매서운 공세도 채 총장 문제로 무뎌지거나 관심을 덛 받을 것으로 보인다.
상황이 이럴진대 칼자루를 쥔 청와대가 모처럼 만에 뽑은 칼을 사의를 표명했다고 해서 '바보처럼' 쉽사리 거둬들일 리가 없다. 공직사회 기강을 잡는 차원에서도 그렇다. 칼날을 쥐고 있는 채동욱 총장을 통해 공직사회에 대한 경고효과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