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황세손의 로맨스-창덕궁 희정당

고궁 전각에 얽힌 재미있는 뒷 얘기 시리즈⑭

창덕궁 희정당. 편전으로 쓰였던 희정당은 마지막 황세손 이구씨의 장례식이 열리기도 했다. (자료제공=문화재청)
▲ 일본에서 객사한 비운의 황세손 이구

2005년 7월 24일. 창덕궁 희정당에서는 마지막 황세손 이구씨의 장례식이 열렸다. 이해찬 국무총리와 여야 정치인, 일본 대사,일본 황실측 인사, 문상객등 천여명이 운집했다.

9일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은 화려하고 엄숙하게 치러졌지만, 그의 삶의 궤적은 장례만큼 화려하지 못했다. 가족조차 변변히 없이 한국과 일본, 미국을 오가며 정체성마저 불분명한 인생을 살아온 마지막 황세손은 도쿄의 아카사카의 한 호텔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았다.


이구씨의 사망으로 조선왕조 6백년의 적통은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마지막 황세손 이구. 한국과 일본등을 전전하다 쓸쓸하게 일생을 마쳤다.
이구는 고종의 일곱 번째 아들이었던 영친왕 이은과 일본인 이방자 여사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인 진이 있었지만, 생후 8개월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해 사실상 마지막 황세손이 됐다.

도쿄의 가쿠슈인 고등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M IT공과대 건축과에 입학했고, 대학을 졸업한 뒤 뉴욕의 건축사무서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해방후 이구는 1952년 대일 강화조약에 따라 국적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바뀌었지만, 조선 왕조 후손의 입국을 껄끄러워한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로 고국에 입국조차 할 수 없었다.

미국 유학당시 독일계 미국인 줄리아와 결혼한 이구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이혼과 잇따른 사업실패로 힘든 삶을 이어왔다. 이구는 홍릉 뒤편, 아버지인 영친왕 묘역에 안장됐다.

이구씨와 줄리아의 다정했던 모습. 외국인이었던 줄리아는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이구씨와 강제 이혼했다.
▲황세손의 로맨스-줄리아와 유위진

마지막 황세손 이구는 가정사도 순탄하지 않았다. 미국 M IT를 졸업하고 미국 아이엠페이(IMPEI)에서 건축사로 활동하던 그는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던 8살 연상의 미국인 줄리아 멀룩을 만났다.

1959년 줄리아와 결혼한 이구는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으로 귀국해 낙선재에서 어머니 이방자 여사와 함께 살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77년부터 별거에 들어갔고 그렇지 않아도 외국인이라며 못마땅해 하던 종친들은 자식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두 사람의 이혼을 종용했다. 결국 이구와 줄리아는 82년 이혼에 이르렀다.

이혼 후 줄리아 멀룩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서 공예점등을 운영하며 장애인 복지사업을 펼치다가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95년 친정인 하와이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구씨의 노제 행렬. 줄리아여사는 장례에도 초대받지 못한 채 먼발치에서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노컷뉴스 자료사진)
그리고 조선의 마지막 황세손비는 그의 장례식에도 초청받지 못한 채 병색이 짙은 82살의 늙은 몸을 이끌고 먼 발치에서 그를 환송했다.

이구씨의 일생에 또 한사람의 여인이 있다. 한국 화랑계의 대모로 알려진 고 유위진씨다. ‘진화랑’ 대표로 더 잘 알려진 유위진씨는 해방후 한국을 드나들던 이구씨의 통역을 해 준 인연으로 만났다. 이들은 그후 8년 가까이 연인관계를 유지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구씨는 유위진을 ‘진’이라고 불렀고, 화랑의 이름도 ‘진화랑’으로 이름 지었다.

‘진화랑’과 유회장의 청운동 자택을 설계한 사람도 다름 아닌 이구씨로 알려져 있다. 낙선재의 이방자 여사도 두 사람의 실질적인 관계를 인정했고, 한국을 찾는 일본인들에게 진화랑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방자 여사의 도움은 진화랑이 우리나라 최대의 화랑으로 성장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경복궁 강녕전을 뜯어와 중건한 희정당의 측면. '강녕전'의 편안할 '강(康)'자가 선명하다. (자료제공=문화재청)
▲‘희정당’이 ‘강녕전’이라고?

희정당은 원래 왕이 침전으로 쓰이다가 나중에 임금의 집무실로 사용되던 곳이다. 창덕궁에는 편전인 선정전이 있지만,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잘 안쓰게 되고, 대신 희정당을 편전으로 사용했다.

현재의 희정당은 1917년 대화재이후 새로 지어진 건물인데, 일제가 복구를 핑계로 경복궁의 내전 건물을 몽땅 뜯어다가 옮겨 지었다. 희정당은 경복궁에서 왕의 침전으로 쓰이던 강녕전을 뜯어 새로 만들었다.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희정당 동서 양쪽 지붕 측면에는 ‘강(康)’자와 ‘녕(寧)’가 쓰여있다. 선정전과 마찬가지로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서양식 건축 양식이 많이 도입됐다.

현재 관람객들의 휴게장소로 사용되고 있는 어차고 자리. 원래 국사가 논의되던 빈청이 있던 자리를 일제가 차고로 만들었다.
대한제국시절에는 왕의 집무실과 외국사진들을 접대하는 곳으로 사용됐다. 그런데 현재 희정당 남행각의 아래쪽에는 까페와 휴게소를 겸하는 장소가 한곳 눈에 띠는데 이곳은 원래 순종임금이 타던 차를 보관하던 어차고(御車庫)가 있던 자리였다.

이 어차고는 원래 정2품 이상의 비변사 당상관들이 국사를 논의하던 빈청(賓廳)이었다. 이곳이 차량을 보관하는 창고로 바뀐것은 경술국치 이후로 추정되는데, 역시 일제의 치졸한 소행인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그런 의미있는 장소를 현재 관람객들이 쉬는 휴식공간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결코 바람직한 방향은 아닌것 같다. 일본의 역사인식을 탓하기 전에 우리의 문화재부터 올바로 보전하고 유지하는 것이 급선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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