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여름 잠실의 허름한 지하골방. 창문을 열어놔도 공기는 텁텁했다. 시계는 오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방에선 중년남자 세명이 충혈된 눈으로 음식물처리기계를 보고 있었다. 박노형 스핀즈이노베이션 대표, 김동회 기술이사, 김변삼 연구소장이었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음식물처리기계를 만드는 중이었다.
이런 기계였다. "설거지를 할 때 음식물찌꺼기가 기계로 투입된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음식물이 찢어지고 건조돼 찌꺼기통에 담기고 수분과 냄새는 하수구로 빠져나간다." 그날은 마지막 실험일이었다. 질긴 음식물찌꺼기를 파쇄할 수 있느냐가 첫째 관건이었다. 만약 파쇄됐다면 그 찌꺼기가 커피가루처럼 나와야 했다. 기계작동 소리가 멈추고 찌꺼기통을 꺼내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됐다"는 말과 함께 환호성을 질렀다. 세계 최초의 음식물처리기 '원심분리배출 기술'은 이렇게 탄생했다. 말 그대로 원심력을 이용해 음식물의 수분과 찌꺼기를 완벽하게 분리ㆍ배출해내는 기술이다.
'그래봤자 음식물쓰레기를 처리하는 기계 아니냐'며 고개를 갸우뚱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기술을 개발하고 상용화하는데 약 40억원이 투입됐다면 어떨까. 이 기술로 만든 음식물처리기 '스핀즈(SPINZ)'가 출시되자 대기업 계열의 자회사 두 곳이 손을 내밀었다면 어떨까. 인터파크HM은 기존의 유통채널을 이용해 제품을 대신 팔아주겠다 했고, 동양매직서비스는 제품의 애프터서비스(AS)를 전담하겠다고 약속했다. 상품성을 인정받은 셈이다.
물론 음식물처리기는 이전에도 있었다. 하지만 기능이 형편없었다. 초기 제품은 녹즙기와 비슷한 원리였다. 음식물을 벽면으로 밀어내면서 물기를 짜내고 건조하는 방식이어서 내부에 음식물찌꺼기가 남아 악취가 났다. 지금처럼 싱크대에 설치해서 사용하는 일체형도 아니었다. 이 때문에 수채 구멍에 모인 찌꺼기를 빼낸 다음 음식물처리기에 옮겨 담아야 했다. 처리시간은 반나절도 모자랄 만큼 길었다. 전기요금은 만만치 않았고, 모든 게 불편했다.
싱크대에 설치하는 일체형도 내부에 찌꺼기가 남는 건 여전했다. 건조 과정에서는 수증기가 새어 나와 악취가 진동했다. 더구나 찌꺼기를 분리하는 거름망이 없어 상당량의 찌꺼기가 하수구로 흘러들어갔다. 2008년 3000억원대로 커졌던 음식물처리기 시장규모가 최근 들어 1500억원대로 주저앉은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CEO의 고집이 혁신 불러
늘 그렇듯 혁신제품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다. 스핀즈도 그랬다. 2006년 유통업을 하던 박노형 대표는 신사업을 구상하고 있었다. 어느날 직원들에게 새로운 사업아이템을 내보라고 숙제를 냈는데, 100여가지의 아이템이 올라왔다. 그중 눈에 띄는 아이템이 있었다. 바로 음식물처리기계였다. 발품을 팔아 체크해보니 시장성도 남달랐다. 필요성은 날로 늘어나는데 제품이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제대로 제품을 만드는 기업을 찾아 유통만 하려 했다. 하지만 마땅한 업체가 없다는 걸 알고는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막연히 생각한 게 원심력을 통한 기술이다. 하지만 5년이라는 세월을 연구개발에 투자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5년이란 세월을 거치는 동안 직원은 모두 회사를 떠났다. 음식물처리기 사업에 확신을 가졌던 박 대표는 '큰일'을 함께할 '전문가 그룹'을 수소문해 모았다. 스핀즈를 만들기 위한 외인부대였던 셈이다.
박 대표는 평소 알고 지내던 김동회 기술이사(당시 동양미래대 생명화학공학과 교수)를 찾아가 자문을 구했다. 생명화학공학을 전공한 김동회 이사는 해줄 말이 당연히 많았다. 원심력을 이용한 음식물처리기 얘기를 듣고는 "꽤 신선하고 재미있는 도전이 될 것 같다"며 합류를 결정했다. 특이한 건 당시 김 이사 스스로 월급을 거절했다는 것이다. 당시 김 이사는 "교수직을 하면서 받는 월급이 있으니 제품 판매를 통해 회사의 이익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한푼도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모 생활과학기업의 창립멤버였던 김변삼 연구소장은 2008년 3월 합류했다. 고주파 음식물처리기를 개발하다 퇴직한 김 소장은 '언젠가 내 능력을 다시 발할 날이 있을 것'이라며 와신상담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박 대표는 손을 내밀었고, 김 소장은 OK 사인을 줬다. 스핀즈의 최초 연구진은 이렇게 결성됐고, 5년간의 긴 연구가 시작됐다.
디자인 작업만 3년 넘게 걸려
개발과정에서 실패는 그리 많지 않았다. 원심분리배출 기술을 개발한 후엔 기계구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만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원심분리배출 기술을 탑재한 음식물처리기계의 디자인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제품을 둥글둥글하게 만들어야 싱크대에 쏙 집어넣을 수 있는데, 그러질 못했다. 기계의 두뇌역할을 하는 회로의 위치와 모양을 함부로 바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핵심부품을 잘 다듬어줄 사람을 찾던 박 대표는 LG전자연구원을 거쳐 회로생산업체를 운영하던 회로전문가를 영입했다. 강대도 실장이었다.
강 실장은 모서리가 둥근 스핀즈의 외형에 맞춰 '기판'을 만들어냈다. '단가를 올려선 안 된다'는 박 대표의 주문도 충실히 따랐다. 하지만 강 실장 역시 애로가 많았다. "스핀즈의 구조를 보니 기존 기판이 들어갈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가격을 올리지 말라더라. 회사를 잘못 옮겼구나 싶었다. 어쩌겠는가. 기판제조업체를 돌면서 '모서리가 둥근 기판을 만들어 놓으면 우리가 고정고객이 되고, 향후엔 다른 이들도 찾을 테니 도와달라'며 애걸복걸해야 했다."
그랬다. 박 대표는 혁신제품 '스핀즈'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각 분야의 전문가와 끊임없이 부딪혔다. 하지만 이는 생산적인 갈등이었다. 이런 갈등이 없었다면 지금의 스핀즈도 없었을 것이다. 스핀즈를 세상에 출시한 박 대표는 이제 '보상'을 꿈꾼다. 스핀즈 개발팀이 공을 들인 만큼 성과가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장은 일단 긍정적인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 출시 이틀만에 예약주문물량만 100여개에 달했다. 고된 혁신의 보상이 시작됐다.
김정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