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인자의 明] 재벌그룹 2인자는 소수정예부대를 이끈다. 그룹의 재무ㆍ전략ㆍ기획 분야를 컨트롤할 뿐만 아니라 계열사간 얽히고설킨 자금을 관리한다. 오너 가족의 후계구도를 정리하는 일도 도맡는다. 2인자가 오너의 신뢰를 한몸에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는 2인자에게 그만큼의 권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2인자의 말과 행동에 오너 못지않은 영향력이 실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실례로 국내를 대표하는 A그룹의 2인자 B씨가 계열사에 방문하면 '그룹 회장이 온 게 아니냐'는 뒷말이 나돌 정도로 성대한 행사가 열렸다. 2인자의 '명明'이다.
어느 기업이든 2인자를 갖고 있다. 글로벌 혁신 아이콘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주에겐 팀 쿡이라는 2인자가 있었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주에게도 스티브 발머라는 파트너가 있었다. 이들 2인자의 역할은 1인자를 경영적으로 보좌하는 것이다. 그림자라기보단 '파트너' '보좌역'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한국은 다르다.
한국 재벌의 2인자는 철저한 그림자다. 이너서클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오너의 말과 행동을 외부에 전달하는 역을 한다. 오너나 오너의 가문의 불미스런 일을 대신 책임지는 등 '궂은일'을 도맡는다. 한국의 2인자를 '오너의 복심腹心''한국형 재벌문화가 잉태한 기형아'라고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역할 달라진 재벌 2인자들
실제로 SKㆍ한화ㆍCJ 등 총수가 구속된 그룹들은 비상경영의 키를 2인자가 아닌 집단지도체제에 맡겼다. SK그룹은 최태원 회장의 경영공백을 메우기 위해 올 1월부터 '수펙스추구협의회'라는 임시체제를 운영하고 있다. 수펙스추구협의회의 핵심은 총수가 아닌 위원회를 통한 의사결정, 지주회사 중심이 아닌 계열사별 자율경영이다. 각 분과에서 주요 현안을 결정한다. SK 계열사 대표들이 구성원이고, 김창근 의장이 이끌고 있다.
한화그룹은 김승연 회장이 법정구속된 올 4월 이후 김연배 한화투자증권 부회장(위원장), 홍기준 한화케미칼 부회장, 홍원기 한화호텔앤드리조트 사장 등 원로 최고경영인(CEO) 3인으로 구성된 비상경영위원회를 출범해 운영하고 있다. 한화의 주력사업인 금융ㆍ제조ㆍ서비스 등 3개 부문으로 이뤄져 있다. CJ그룹은 올 7월 이재현 회장의 구속으로 인한 경영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룹경영위원회'를 발족했다. 그룹경영위원회는 손경식 회장을 위원장으로 이미경 부회장, 이채욱 CJ대표, 김철하 CJ제일제당 사장 등 5명으로 구성돼 있다. 위원회는 그룹의 경영안정과 중장기발전전략, 신뢰성향상 방안을 중점적으로 논의한다.
집단지도체제, 땜질용에 그쳐선 안돼
집단지도체제가 재벌의 비틀어진 의사결정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발판 역할을 톡톡히 할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총수의 그른 의사결정에 브레이크를 거는 등 독단적인 리더십을 막는 새로운 장치가 될 것이라는 얘기다. 문제는 이런 집단지도체제가 총수가 복귀해도 가동될 수 있느냐다.
김은경 기자 kekisa@thescoo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