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 참가자와 친분이 있는 성악가가 심사위원으로 들어가 점수를 몰아주는가 하면, 이를 알게 된 또다른 참가자가 재심의를 요청하자 오페라단 측이 협박까지 한 것으로 드러났다.
작곡가 B 씨가 국립오페라단 재(再)공연 작품 공모에 지원한 건 지난 7월. 지난 3년 동안 국립오페라단 창작사업 가운데 우수작으로 선정된 작품들을 다시 심사하는 것으로, 최종 당선된 작곡가에게 정부 예산 1억 5000만 원이 공연제작비로 지원된다.
B 씨는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약 2년 동안 500여 장에 달하는 오케스트라 악보를 쓰는 것은 물론, 대본까지 직접 작성하면서 1인 2역의 노력을 오롯이 쏟아부었다.
지난해 우수창작품으로 선정돼 "괴테의 숨은 보석을 끄집어냈고 원작이 갖고 있는 현대성을 재해석해 오페라로 재탄생시켰다"는 호평을 받았던 터라 기대도 컸다.
마침내 B 씨는 지난 7월 22일에 진행된 1차 서류 전형을 통과했고, 다른 작곡가인 C 씨와 이튿날인 23일 최종 면접에서 경합을 벌이게 됐다.
석연치 않은 정황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B 씨는 면접 대기실에서 상대팀중 한 명이 "A 교수 왔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는 교수가 있었거니" 하고 B 씨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하지만 심사 기간 내내 심사위원과 일부 참가자가 결탁돼있다는 소문이 돌던 터라 찜찜한 기분을 감추기는 힘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면접을 본 지 24시간 만에 최종 당선작이 발표됐다. 원래 면접 1주일 뒤인 8월 첫째 주로 예정돼 있던 발표였다.
2010년부터 국립오페라단 우수 작품 공모 등에 참가했던 B 씨는 "일정을 무시하고 갑자기 발표를 하는 경우는 처음"이라며 의아해했다.
결과는 탈락. B 씨는 떨어진 이유도 궁금하고 의심스러운 정황들이 많아 오페라단에 채점표 공개를 요청했다.
"심사위원의 명예가 걸렸기 때문에 공개할 수 없다"는 오페라단의 반대를 무릅쓰고 끈질긴 설득 끝에 채점표를 손에 넣었다.
◈ 7점차 앞섰는데 탈락…서울대 성악과 교수의 이상한 만점
채점표를 받아 든 B 씨. 이번 심사에 문제가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의심스러운 정황들이 퍼즐처럼 맞아떨어졌던 것.
채점표에 따르면 총 5명의 심사위원 가운데 4명의 심사위원은 작곡가 B 씨에게 16, 16, 18, 19점을, 상대 작곡가 C 씨에게는 13, 15, 16, 18점씩 줬다.
이때까지만 해도 B 씨가 총점에서 7점 앞서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심사위원, 서울대 성악과 교수 A 씨의 점수로 결과가 송두리째 뒤바뀌었다. A 교수는 골고루 중상(中上)의 점수를 받은 B 씨에게는 8점을, 상대적으로 낮은 점수를 받은 C 씨에게는 20점 만점을 준 것이다.
A 교수는 이번 심사기간 내내 참가자와 친분이 있다는 소문 속의 주인공이었다. 상대 작곡가 C 씨가 소속된 오페라단의 D 단장이 A 교수와는 오랫동안 잘 알고 지내왔다는 것이다.
실제로 D 단장과 A 교수는 일부 오페라에서 더블 캐스팅으로 함께 공연한 것은 물론, D 단장의 오페라단 창단 이후 열린 2차례의 공연에 A교수가 모두 주인공을 맡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A 교수는 심사 과정에서 B 씨에게 낮은 점수를 준 이유를 "작품 수정·보완 안이 확실하지 않다고 판단된다"라고 밝혔다.
이는 나머지 심사위원들의 "본인 작품에 대한 평가가 명확하다, 지난번 연주의 평가와 분석이 정확하다"는 평가와는 180도 정반대다.
◈ 부적격한 심사위원‧채점방식 "재심의" 요청, 돌아온 건 '협박'
B 씨는 또 심사위원 5명이 각각 0점부터 20점씩 점수를 매겨 합산하는 채점 방식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이번 경우처럼 심사위원이 몰아주기로 마음만 먹으면 혼자서도 100%의 결과를 좌우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같은 결과를 막기 위해 최상점이나 최하점은 제외하고 합산해 평가하는 게 일반적이다. B 씨는 "이는 초등학생 콩쿨에도 적용되는 방식인데, 국고로 운영되는 '국립' 오페라단의 심사나 관리 체계가 미흡하기 짝이 없다"고 주장했다.
심사위원으로 들어갔던 또 다른 작곡가는 "내가 점수를 높게 준 참가자는 떨어졌지만 점수는 작곡가 재량이니 어쩔 수 없다"면서도 "심사의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최상점과 최하점을 빼고 합산하는 것이 맞다. 더구나 참가자와 친분이 있는 심사위원이 들어간 것은 유감"이라고 말했다.
B 씨는 또 국립 오페라단 공연에서 악보와 대본 심사가 빠진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오페라단 측은 "우수작품 심사에서 이미 악보와 대본은 봤던 재공연 심사여서 이번에 굳이 다시 보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B 씨는 "우수작품 심사 때와 같은 심사위원들도 아니고, 특히 재공연 심사 때는 무대 위에 매달아놓은 카메라로 찍은 동영상 달랑 하나로 평가했다"면서 "국고 1억 5000만 원이 드는 오페라를 심사하면서 이렇게 허술하게 할 수 있냐"고 지적했다.
B 씨는 이같은 이유들로 국립오페라단과 문화관광부에 '재심의'를 요청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협박이었다"고 주장했다.
B 씨는 "내가 계속 문제를 제기하니까 '내년에 공모 안 할 것이냐'고 했다"면서 "작곡가의 미래를 담보한 협박이 아니고 뭐냐. 난 이제 더 이상 참가 못 한다"며 가슴을 쳤다.
◈ 문화부, 심사위원 부적격 인정…재심의는 No!
하지만 국립 오페라단과 문화관광부 측은 협박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오페라단 관계자는 "협박이 아니라 B 씨가 정말 잘되기를 바라고 걱정하는 차원에서 한 말이었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심사위원으로 부적격한 교수가 들어간 것에 대해서는 오페라단과 문화관광부 모두 인정하는 분위기다.
다만 "매번 심사마다 다른 심시위원들로 구성해야 하는데 좁은 오페라 바닥에서 저명하고 유능한 심사위원들을 모셔오기가 쉽지 않다"면서 "게다가 참가자와 친분관계까지는 일일이 확인하기도 힘들다"고 해명했다.
재심의 거부에 대해서도 문화부 관계자는 "B 씨의 주장도 일리가 있어 4군데에서 법률 자문을 받았지만, 모두 재심의까지 갈 사안은 아니라고 판단됐다"고 말했다. 의혹은 있지만 재심의할만큼 근거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일정보다 일주일이나 빠르게 결과가 발표난 것에 대해서는 "재공연 당선작은 오는 11월에 공연될 예정이기 때문에 무대 대관이나 기획 등을 하려면 시간이 빠듯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입장이다.
문화부 관계자는 "대신 미흡하게 처리한 국립 오페라단 관계자들을 징계하는 한편, 점수채점 방식이나 심사위원 규정 등을 보완해나갈 예정"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