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다보면 박 대통령의 생각이 주술처럼 되뇌어 진다. 그런 점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화법과 많이 닮았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부분에서만 국한된 얘기다. 정치적으로 논란이 되는 부분에서는 말을 아껴서 청와대와 여권에서도 답답함을 느낄 정도다.
국정원 댓글 의혹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박 대통령은 지난 6월 이후 국정원 댓글 문제와 관련해 몇 차례 입장을 밝혔다.
국정원에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고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지도 않았지만 의혹이 있다면 철저히 조사를 하겠고, 사법부의 판단이 나오면 그에 따라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박 대통령의 발언은 국정원은 물론 군 사이버사령부 국가보훈처 등의 선거개입 정황이 드러나면서 너무 안이한 현실 인식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눈덩이처럼 불거진 관련 의혹들에 대해 새로운 입장 표명이 필요하다는 압박을 불러 왔다.
대통령의 입장 표명을 요구하는 여론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정홍원 총리가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대독총리'라는 비판이 나왔고, '김빼기'라는 분석도 있었지만 어쨌든 비등하던 여론을 완화하는 효과도 약간은 있었다.
이런 가운데 박 대통령이 사흘이 지난 31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국정원 댓글 사건과 여기서 파생된 국가기관 선거개입 의혹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큰 틀에서는 기존 몇 차례의 직접 언급이나 사흘전 정 총리의 담화와 차이가 없고 일맥상통한다.
박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의혹을 살 일을 하지 않았지만 국가기관이 선거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있으니까 정확히 밝히고, 책임을 물을 일이 있다면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사법부의 판단과 수사결과가 국민에게 의혹을 남기지 말아야 하며, 책임 맡은 분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믿음도 표시했다.
'사법부 판단을 정치권이 미리 재단하고 정치적 의도로 끌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검찰 수사에 영향을 미치고 대선에 불복하는 듯한 모양새를 가끔씩 연출하고 있는 야당에 대한 불편한 심경도 드러냈다.
입장표명이 여기서 그쳤으면 기존 입장에서 한 치도 더 나가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겠지만 박 대통령의 발언은 한발 더 나아갔다.
박 대통령은 "정부는 철저한 조사와 사법부 판단이 나오는대로 불편부당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고, 재발 방지책을 마련할 것"이라는 점을 또 한번 강조했다.
"앞으로 모든 선거에서 국가기관은 물론이고 공무원 단체나 개별 기관이 혹시라도 정치적 중립을 위반하는 일이 없도록 엄중히 지켜나갈 것"이라는 부분은 당연한 얘기지만 여태까지 발언에서는 없던 새로운 내용이다.
"내년도 지방선거에서 이런 일련의 의혹을 반면교사로 삼아 선거문화를 한 단계 끌어 올리는 계기로 삼겠다"고 말한 부분도 주목할 만하다.
박 대통령은 국정원 댓글 관련 언급을 마치면서 "21세기 대한민국은 어느 누구도 진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할 수 없을 정도로 민주주의가 성숙된 나라"라며 "진실을 가리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리 국민은 정치권이 정쟁을 멈추고 사법부의 판단을 기다려서 그 결과에 따라 책임을 묻고 책임을 지는 성숙한 법치국가의 모습을 바라고 있을 것이라는 말로 대선 이후 10개월간 계속되고 있는 국정원 관련 논란 종식을 촉구했다.
박 대통령이 정 총리 담화 사흘만에 다시 비슷한 내용이지만 좀 더 힘있고 강한 어조로 선(先) 진상규명 후(後)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책 마련 등을 언급한 것은 오는 2일 서유럽 방문을 앞두고 국내 문제에는 소홀한 채 해외로만 나돈다는 비판을 차단하려는 뜻으로 보인다.
10.30 재보선의 압도적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배어있다는 분석도 있다. 국정원 댓글 문제를 둘러싼 정치권의 끊임없는 논란에 대해 국민들이 피로감을 표출하고 있다고 보고 정쟁에서 벗어나 '경제살리기'와 '일자리 창출'에 모든 역량을 쏟아 부을 때가 됐다는 판단인 것이다.
박 대통령의 국정원 언급에 대해 여당은 "정쟁으로 진실규명에 어려움을 겪는 국가정보원 사건이 정치적인 의도로 변질되는 것을 막고자 한 박 대통령의 발언은 적절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야당인 민주당(배재정 대변인)은 "법과 원칙을 이야기하며 검찰총장, 수사팀장 찍어내며 수사 방해한 것은 누구인가"라면서 박 대통령의 사과가 우선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박 대통령의 발언이 야당으로부터 공감을 얻어내지 못하는 이상 국정원 댓글 논란과 여기서 파생된 제반 문제를 둘러싼 혼란스런 상황이 쉽사리 끝날 것 같지는 않다.
특히 박 대통령은 수사팀에 대한 신뢰를 보여줬지만 댓글 사건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 의지를 갖고 있던 윤석렬 수사팀장은 교체됐고, 수사팀의 바람막이 역할을 했던 채동욱 검찰총장도 '찍어 내림' 당했다.
군 사이버사령부 요원들의 선거개입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지만 개인적인 차원의 일로 몰아가는 듯한 인상도 지울 수 없다.
대선 전에 편파적인 안보교육 사실이 드러난 박승춘 국가보훈처장은 오히려 안하무인적 태도로 국회를 무시하고 있다.
여당인 새누리당은 국가기관의 선거개입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촉구하는 야당의 요구를 선거불복으로 몰아부쳤다.
박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국정원의 댓글 문제를 넘어 국가기관의 선거개입 문제로 커져 더욱 가팔라진 대치정국을 풀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