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오후 10살도 안 돼 보이는 필리핀 섬마을 아이들이 도로변에서 위험천만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아이들은 시속 100㎞에 가까운 속도로 오가는 차량을 향해 "도와달라"고 외치거나 "식량이 필요하다"고 쓴 푯말을 들고 도움을 호소했다.
필리핀 세부주(州) 북쪽 끝에 있는 섬 반타얀(Bantayan).
빼어난 자연경관 때문에 '작은 보라카이'로 불리는 휴양지이지만 지난 8일 태풍 하이옌이 할퀴고 지나면서 한순간에 폐허가 됐다.
백사장에는 관광객 한 명 찾아볼 수 없고 주민들은 눈앞에 펼쳐진 재난에 말을 잃었다.
차로 30분을 달려 들어간 내륙 마을은 그야말로 쑥대밭이었다. 가옥 대부분이 나무로 지어져 부실했던 데다 울창한 야자수 숲 한가운데 있었던 탓에 태풍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비바람에 허리가 꺾인 야자수들은 인근 가옥들을 덮친 상태로 사방에 너부러져 있었다.
취재진이 찾아간 서쪽 지방 마을 구와논(Guiwanon)도 주변 야자수가 집을 덮쳐 피해가 큰 지역 중 한 곳이었다. 2천540여 명이 거주하는 마을은 태풍 하이옌에 200여 가구의 집이 완파됐다.
이날 오후 구호 식량을 실은 트럭이 마을에 도착하자 주민들은 속속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트럭에는 한국 NGO 단체 '희망브리지'가 마련한 총 250세대 분량의 쌀, 설탕, 식용유가 가득 들어 있었다. 집을 잃은 주민에게 나눠 줄 50m 넓이의 간이 천막도 10개 넘게 포함됐다.
이은애 희망브리지 경영지원팀 차장은 "반타얀 섬 중부 지역에서만 3만 7천 명이 넘는 이재민이 발생했지만, 외부에 알려지지 않아 도움을 거의 못 받고 있다"며 "앞으로도 구호가 소외된 지역에 지원을 집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쓰러진 야자수 위에서 뛰놀던 아이들은 타지 사람을 처음 본 듯 수줍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희망브리지는 24일 타클로반 동쪽에 있는 사말 섬에 2차 구호물자를 전달할 계획이다.
최재봉 긴급구호팀 간사는 "사말 섬은 피해규모가 타클로반처럼 큰데도 지원이 미약하다"며 "반타얀 섬보다 4배 많은 규모로 지원할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