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작은 연필심이 있다. A사는 연필심 기둥을 1㎜로, B사는 2㎜로 만든다고 치자. 어느 기업의 연필심이 단단한지는 모른다. 그런데 B사가 2㎜ 연필심의 내구성耐久性이 가장 뛰어나다는 걸 과학적으로 입증한다. B사의 '2㎜'는 연필심을 만드는 스탠더드(Standardㆍ표준)가 되고, B사는 이를 적용한 다른 기업으로부터 로열티를 챙긴다. 표준을 선점하는 건 이처럼 중요하다.
미국 상무부 국가표준연구원 전 원장 캠머가 "이젠 신新경제가 아니라 신표준경제 시대"라고 주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례도 많다. PC운용시스템의 표준은 '윈도(window)'다. LNG선의 '맵브레인 방식의 구조설계표준'을 장악한 프랑스 엔지니어링 업체 GTT는 매년 수천억원대의 로열티를 벌어들인다.
+ 표준의 정의가 애매모호하다는 평이 있다.
한필순 한국표준학회 이사(이하 한필순) : "표준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을 처리할 때 쫓을 만한 기준, 규범, 목표다. 사람이 태어나서 그 나라의 언어를 익히고, 생활관습을 배우는 것은 표준을 습득하는 과정이다."
최동근 한국표준협회 연구원(이하 최동근) : "산업표준이란 산업제품의 생산ㆍ유통ㆍ소비를 표준화하는 것이다. 이를 표준화하기 위하여 규격ㆍ품질ㆍ성능 등을 통일해 기준으로 정한 것이 표준이다."
허경옥 성신여대 교수(이하 허경옥) : "기업 혹은 국가마다 다른 표준을 설정하고 있는데, ISO(국제표준화기구)는 각기 다른 산업부문별 표준을 '국제적 표준'으로 만들고 있다."
한필순 : "1960년대 공업표준화법을 제정한 게 '표준화 작업'의 출발점이다. 정부 주도로 작업을 추진한 덕에 '표준화의 속도'는 빨랐다. 하지만 민간의 능력이 함께 배양되지 않은 건 숙제로 남아 있다."
박종섭 산업통상자원부 기술표준원 연구관(이하 박종섭) : "1960년대엔 민간기업이 '표준'이라는 의미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고, 그럴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산업표준의 중요성을 정부가 먼저 인식한 건 분명히 '공'이다. 하지만 세계시장에 걸맞은 표준화 작업을 꾀하는 덴 성공하지 못한 듯하다."
허경옥 : "지난 자료를 분석해 보면 표준 부문에서의 글로벌 경쟁력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특히 신新수요 분야의 표준연구가 미흡하다. 이는 한국의 표준화 작업이 정부 주도로 이뤄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제 민간 주도로 표준화 작업을 해야 할 때다."
+표준화 작업의 공과를 소비자ㆍ생산자 입장으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최동근 : "생산자는 표준화 작업을 통해 합리적 생산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노동생산성과 생산능률을 끌어올렸을 뿐만 아니라 원가도 절감했다."
양희정 KTCS 센터장(이하 양희정) : "소비자 측면에서 표준화 작업의 의미는 더 크다. 생산시스템이 단순해지면서 양질의 상품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게 표준화 작업의 최대 성과가 아닐까 한다."
한필순 : "세계무역장벽이 허물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 표준을 선점하는 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세계시장에서의 승자냐, 패자냐가 판가름날 정도다. 유럽연합(EU)의 경우, 기후변화에 대응한다는 명목으로 제품을 표준화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 있다."
박종섭 : "미국은 모든 기술표준을 기업 경쟁력을 높이는 무기로 사용한다. 미국기업이 개발한 기술표준은 '특허'라는 미명으로 보호를 받는다. 그러면 그 기업은 자신들의 기술표준으로 경쟁사를 제압하려 한다."
최동근 : "얼마 전까지 삼성전자와 애플이 국제표준특허를 두고 싸우지 않았나. 대표적 사례다."
+ 한국이 표준 관련 시장을 이끌기 위해선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허경옥 : "표준이 매년 25억 파운드(약 4조6000억원)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한다. 또한 표준이 노동생산성 증가의 17%가량에 기여한다. 그런데 국제표준화기구(ISO),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에 등록돼 있는 국제표준 2만여종 가운데 '메이드 인 코리아' 표준은 109종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국제표준화 활동을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했다. 최근 5년간만 따지면 국제표준 72%를 우리가 선점하고 있다. 우리의 표준화 작업이 경쟁력이 있다는 걸 정부와 국민이 절대 간과해선 안 된다. 지금은 자신감과 노력이 필요할 때다."
한필순 : "관세장벽이 낮아지면서 선진국ㆍ신흥국 모두 '무역기술규제(TBT)'를 강화하고 있다. 그 결과 글로벌 시험인증시장 역시 확대일로를 걷고 있다. 이젠 정부보단 민간 주도로 세계시장에서 싸움을 해야 한다."
최동근 : "세계는 지금 자유무역시대다. 국가간 상품과 서비스의 자유로운 이동을 위해 국제표준을 도입하는 나라가 늘어나고 있다. 표준기술이 전체 무역의 80%에 영향을 끼친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국내 기업 스스로 '표준선점 경쟁'에 나서야 한다."
양희정 : "표준화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아쉽다. 표준화를 등한시하는 민간기업도 아직 많다. 정부의 적극적인 홍보방안 마련이 필요해 보인다."
양희정 : "그렇다. 정부의 지원이 더욱 필요해 보인다. 현재 국내 시험인증기관은 1600여개로, 기관당 평균 매출은 8억2000만원에 불과하다. 국내 인증시장 규모가 2조6000억원에 달하는데, 그중 50% 이상을 글로벌 기관이 점유하고 있다. 민간을 살려야 표준의 생태계가 살아난다."
+사실 정부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는 '표준 중복 현상'에 있다. 부처별로 표준의 중복유형이 2014개에 달한다. 112개의 법정인증제도와 73개의 민간인증제도도 충돌하고 있다. 이런 문제를 빨리 개선하는 게 시급해 보인다.
최동근 : "옳은 지적이다. 무엇보다 어떤 표준을 인증받으려면 각 부처별로 별도의 실험을 거쳐야 한다. 기업으로선 금전적ㆍ시간적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부처이기주의를 없애지 않는다면 '표준경제' 시대를 리드할 수 없다."
한필순 : "국가표준이 'KS' '기술기준' 두개로 운영돼 유사규제들이 난립할 가능성이 크다."
박종섭 : "정부는 국가표준인증제도 선진화를 목표로 부처별 인증제도의 중복성과 불합리성을 개선하고, 범부처 참여형 단일 국가 표준체계를 구현하고 있다. 기업ㆍ소비자 중심의 시험인증체계도 구축할 예정이다."
+표준 중복 현상 때문에 기업들이 경제적 손실을 입을 수도 있을텐데.
한필순 : "당연하다. 중소기업 한곳당 14.9개의 인증을 보유하고 있다. 이를 취득ㆍ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은 연평균 3230만원이다. 표준 중복 현상을 없애면 기업으로선 비용절감을 꾀할 수 있다."
+최근 들어 표준이 산업기술에서 생활표준으로 이동하고 있다. 최근 정부도 생활표준 관련 대책을 발표했는데, 정의가 무엇인가.
허경옥 : "생활표준을 쉽게 말하면 이렇다. '제품이든 서비스든 표준기준을 적용해 불편함을 없도록 하는 것'이다. 가령 지역 간에 상이하게 운용되는 선후불 교통카드를 국가 표준으로 일원화해 전국 어디에서든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생활표준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최동근 : "사회가 갈수록 고령화ㆍ정보화ㆍ자동화되고 있다. 표준의 역할이 일상생활에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종섭 : "정부가 '국민행복표준'이라는 제도를 운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만큼 표준이 일상생활에 파고들고 있다는 얘기이다. 이런 표준이 요즘 제조에서 서비스 분야로 확대되고 있는 걸 종종 느낀다."
허경옥 : "최근 기업에서 추진하고 있는 '서비스 표준화'가 바로 생활표준의 단적인 사례다."
양희정 : "KTCS(KT 계열사)는 토털콘택서비스기업이다. 기업 특성상 사회소외계층, 체납자 등을 대상으로 정부 시책 관련 업무를 수행한다. 하지만 도움을 요충하는 '콜'의 수가 들쭉날쭉해 상담사의 업무부담이 많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10년 '하트너'라는 기업문화를 조성했고, 전 직원이 1인 56시간의 표준화 관련 교육과정을 이수했다. 표준화 과제로 멀티상담시스템을 구축해 업무 프로세스 개선하고 정보공유 프로세스를 마련했다. KTCS가 서비스혁신 대통령상(2007), 한국서비스품질 우수기업(2010), 2년 연속 대통령상을 잇따라 수상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로 표준화 작업 이후 직원들의 업무능력이 개선되고 업무부담감은 줄어들었다. 특히 신규직원의 적응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됐다."
박종섭 : "생활에 표준을 적용하면 국민이 보다 편안하고 안전한 삶을 누릴 수 있다. 가령 세제사용, 고추장 맛등급, 산후조리원ㆍ예식장을 표준화했다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국민행복표준화 과제'도 이런 맥락이다."
박병표 기자 tikitiki@thescoo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