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은 조선시대에서 일제강점기,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장소를 어떻게 지배했고, 또 이것은 우리 가요에 어떻게 담겨 있을까?
조선시대부터 북악산을 등지고 청계천을 바라보는 청계천의 북쪽 동네 '북촌'은 고관대작과 권세가들의 거주지였다. 경복궁과 창덕궁 두 궁궐의 사이에 있으면서 지리적으로도 남향의 배산임수 명당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산 밑 '남촌'은 북향이라 볕이 잘 들지 않고 땅이 축축해 거주 조건이 '북촌'만큼 좋지 못했다. 그래서 '남촌'은 관직이 없는 가난한 선비나 몰락한 양반들이 살던 곳이었다.
조선시대에 이어져 온 북촌과 남촌의 이러한 힘의 구도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빼앗은 후부터 반대로 역전되기 시작한다. 일본인들이 서울 사대문안 도성 내 남산 자락 '남촌'에 자리하면서 지난 19세기말부터 일제강점기 내내 남촌 명동과 충무로가 집중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이때부터 명동과 종로의 장소성이 담긴 노래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종로 네거리에 해가 저물어
호라 호라 부르며 수레를 끌고
엿장수 할아버지 돌아가는데
재깍재깍 가위 소리 처량도 하다
(중략)
어떤 촌 영감이 정거장에서
잔돈을 이십전만 감해 달라고
기차는 시간되어 떠나가는데
껑충껑충 뛰어 가며 감해 달란다
M. 봉봉4중창단 <종로 네거리>
종로는 전차가 지나던 조선의 대표 거리였지만, 이 노래에선 여전히 조선시대 시전에 어울릴 법한 모습, 엿장수 영감이 목판을 지고 다니는 다소 한가한 거리로 그려지고 있다. 남촌의 화려함 뒤에, 휑덩그렁하게 빈 듯하며 심지어 어둠침침하다고 당시 잡지에도 묘사됐던 북촌의 종로 네거리의 모습이 그려진 노래다.
반면, 남촌은 우리 노래에 어떻게 담기고 있었을까?
오빠는 트집쟁이야 뭐
오빠는 심술쟁이야 뭐
난 싫여 잉 난 싫여 잉
내 편지 남몰래 보는 건 난 싫여
명치좌(明治座) 구경갈 땐 혼자만 가구
심부름 시킬 때면 엄벙땡하구
오빠는 핑계쟁이 오빠는 안달쟁이
오빠는 트집쟁이야
M. 박향림 <오빠는 풍각쟁이>
이 아가씨, 오빠한테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심부름 시킬 때면 얼렁뚱땅 시키면서, 명치좌에 좋은 프로 들어왔는데도 여동생을 떼어놓고 혼자만 구경을 가니, 화가 날 수밖에. 1930년대 우리나라에서 가장 화려한 극장이었던 명치좌, 해방 후 국립극장으로 썼고, 지금 명동예술극장이 되어있는 그곳이다. 엿장수 영감이 지나다니는 종로네거리에 비해, 청계천 남쪽의 진고개 그러니까 지금의 충무로인 본정 혼마치와 지금의 명동인 명치정 메이지쵸는 일본인들이 자리 잡은 최고의 번화가로 거듭나고 있었다.
경기대 안창모 교수는 "서울 도성 안에서 일본인들이 거주할 수 있는 곳을 찾았지만, 이미 부를 소유한 북촌 안으로 진입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땅을 싸게 사서 집단 거주지로 만들기 위해서는 남촌이 훨씬 적합했고, 그렇게 남촌이 일본의 거점이 된 이후 역사적인 운명의 전환을 겪게 되는 것"이라고 그 배경을 설명한다.
내뿜는 담배 연기 끝에
희미한 옛 추억이 풀린다
조용한 다방에서 뮤직을 들으며
가만히 부른다 흘러간 옛님을
부르누나 부르누나
사라진 꿈을 찾을 길 없어
연기를 따라 헤매는 마음
사랑은 가고 추억은 남아
불루스에 나는 운다
내뿜는 담배 연기 속에
희미한 옛 추억이 풀린다
M. 이난영 <다방의 푸른 꿈>
1930년대 화려한 모던 경성의 남촌, 그 카페나 다방의 풍경이 아마 이런 모습이었을 텐데요, 일제강점기 노래 중 가장 블루스적인 노래, 이난영의 <다방의 푸른 꿈>. 그의 남편 김해송이 작곡한 노래다. 이 노래를 부를 때에, 가수 이난영은 한복을 입지 않고, 긴 드레스에 긴 검은 장갑을 끼었다고 한다. 큰딸인 김시스터즈의 김숙자 씨는, 어린 나이에도 우리 엄마 참 멋있다고 생각했단다. 이 시절 남편인 김해송은, 동료이자 아내인 이난영을 ‘란짱’이라고, 일본식 애칭으로 불렀다.
1930년대 후반, 식민지 경성의 한복판에서 모던하게 살아가고 있던 이들은, 이미 일본어가 네이티브 수준이었습니다. 당시 모던보이, 모던걸은 이렇게 전화로 연애를 합니다.
(남) 모시모시 아 모시모시 혼쿄꾸 후따센 나나햐꾸 하찌쥬 야빠요
(남) 헬로 헬로 당신이 정희씨요
(여) 네 네네 왓 이즈 유어 네임
(남) 엊저녁 속달편진 보셨을 테지요
(여) 아 약광곤줄 잘못 알고 불쏘시갤 했군요
(남) 저응 저응 아이 러브 유
(여) 아이고 망칙해라 아이 돈 노우 빠이 빠이
(남) 아차차차차 으응 으응 으응 으응 저 끊지 말아요 죠죠죠 죠또마떼
(합) 끊으면 나는 싫어 나는 몰라요
M. 박향림 김해송 <전화일기>
'조토마테', '왓 이즈 유어 네임', 이 남녀는 조선어까지 무려 3개 국어를 구사한다. 조선인들끼리도 일본어로 수다를 떠는, 이 모던보이 모던걸의 도시는 바로 남촌, 그 중에서도 명동과 혼마치였다. 지금 한국은행 박물관이 된 조선은행이 멋지게 서 있었고, 맞은편 서울중앙우체국 자리에는 3층짜리 경성우체국이 서 있었다. 미스코시백화점, 조지야백화점 같은 곳에 들어서면 말소리 절반 이상이 일본어였다.
일본 긴자 거리에 온 것처럼 화려한 남촌, 명동과 혼마치. 그곳에서 커피와 양과자를 즐겼던 모던보이 모던걸들에게 남촌은 도쿄를 경험해보는 곳인 동시에, 겉으로 화려하지만 내면이 무력한 식민지 백성의 자화상을 확인하게 하는 곳이었던 것이다.
해방 후 서울을 노래한 대중가요에서, 정말 오래간만에 남촌이 아닌 북촌 광화문 거리가 등장한다.
은마차 금마차에 태극기를 날리며 건설를 노래하는 서울 거리냐
울어라 은방울아 세종로가 여기다 삼각산 바라보니 달빛도 곱네
은마차 금마차에 태극기를 날리며 자유를 울고짓는 서울 거리냐
울어라 은방울아 세종로가 여기다 인왕산 바라보니 달빛도 곱네
장세정 <울어라 은방울>
일제강점기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북촌의 광화문, 세종로 그리고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과 그 뒤에 보이는 진산인 삼각산까지 이 노래의 앵글에 담긴다. 그러나 이런 대중가요가 많은 것은 아니었다. 해방이 된다고 해서 대중들의 일상생활이 갑자기 변화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여전히 서울의 최고 번화가는 충무로와 명동였다.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때
쇼윈도 그라스엔 눈물이 흘렀다
이슬처럼 꺼진 꿈속에는
잊지못할 그대 눈동자
샛별같이 십자성같이
가슴에 어린다
보신각 골목길을 돌아서 나올때엔
찢어버린 편지에는 한숨이 흘렀다
마로니에 잎이 나부끼는
네거리에 버린 담배는
내맘같이 그대 맘같이 꺼지지 않더라
M. 현인 <서울야곡>
1950년에 발표된 현인의 <서울야곡>. 가수 현인이, 이 멋진 탱고 곡을 직접 작곡했다. 노래의 1절은 남촌의 충무로, 2절은 보신각 앞 종로네거리, 그러니까, 북촌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를 돌고, 다시 3절에서는 네온이 반짝이는 명동의 밤거리로 되돌아온다.
여기서 ‘충무로’는 즉 혼마치에 붙은 새 이름이다. 가장 일본스러운 거리였으니, 해방 후에 일본색을 제압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인물 충무공 이순신의 호를 사용해서 충무로라 이름지은 것. 하지만 일제의 영향이나 왜색 여부를 떠나 여전히 충무로와 명동은 가장 화려한 곳이었다.
그리고 6.25 전쟁이 터졌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수도 서울을 재건해야 마땅했지만, 오히려 서울 한복판은 전쟁으로 잿더미가 됐다. 이때 예술인, 지식인들은, 잿더미가 되긴 했지만 그나마 예전의 화려함과 예술적 낭만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는 명동으로 몰려들었다. 이 노래는 명동의 술집에서 탄생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에 밤을 잊지 못하지.......
(하략)
M. 이동원 <세월이 가면>
술 마시고 다방 다니는 사람들이 명동에 모였다면, 데이트를 즐기는 남녀는 누구나 명동의 뒤편 남산으로 갔다. 예전에 위용을 떨치던 일본 신사가 헐린 자리, 남산은 서울시민 최고의 데이트 장소, 나들이 장소가 됐다.
서울의 아가씨는 명랑한 아가씨
남산에 꽃이 피면 라라라라 라라라
하이힐 소리높이 라라라라 라라라
누구나 반갑게 웃음꽃을 피워요
서울의 아가씨는 사랑스런 아가씨
서울의 아가씨는 예쁘고 상냥해
서울의 아가씨는 깍쟁이 아가씨
거리에 불꽃 피면 라라라라 라라라
야야야야 야야야 야야야야 야야야야
M. 이시스터즈 <서울의 아가씨>
지방도시에 가도 명동은 있었다. 서울의 명동거리처럼 화려한 거리에 그런 명칭이 붙었다. 가게 상호도 ‘명동제과’, ‘명동양행’ 같은 이름을 지방에서 많이 썼다. 마치, 서울에 ‘뉴욕제과’, ‘독일제과’, ‘불란서빵집’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말하자면, 당시 서울은 뉴욕과 파리를 동경했고, 지방은 서울의 명동을 동경했던 것이다.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고 한다. 일제강점기가 끝난 지 수십 년이 지나도록 그들이 만들어놓은 서울의 번화가 명동은 그 위력을 이어갔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고 있었다.
얼어붙은 달 그림자 물결위에 비치며
한 겨울에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에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얼어붙은 달 그림자 물결위에 비치며
한겨울에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에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람의 마음을
M. 은희 <등대지기>
노래가 너무 건전해져서, 당황하셨을 듯하다. 끈적한 아저씨 분위기가 사라지고, 노래가 갑자기 학생 분위기로 바뀌었다. 색소폰이 흐느끼는 캄보밴드의 반주에서, 달랑 통기타 하나 들고 노래하는 포크송의 시대, 바로 1970년대 청년문화의 시대가 된 것이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60년대 종로 YMCA에서 열린 싱얼롱 모임이었다. 그곳에서 싱얼롱 모임을 이끈 이가 바로 가수 전석환이다. 어깨에 둘러멘 기타 한 대로 싱얼롱 열풍을 일으키면서 전국에 기타 배우기 붐을 불러온 인물일 뿐 아니라, 수많은 포크 노래들을 우리말로 번안하면서 우리나라 기타 포크음악의 장을 연 인물이다.
싱얼롱과 포크음악이 자라난 곳, 왜 하필 종로2가였을까요?
성공회대 신현준 교수는 "기타 포크음악은 교회의 가스펠송 그리고 학생문화와 관련이 깊고, 종로는 학교들이 모여있을 뿐 아니라 전통 깊은 교회들이 모여 있는 장소였다"면서 "이런 종로의 장소성이 포크 음악을 탄생시켰다"고 설명한다.
이 새로운 세대가 한국 대중가요계의 새로운 흐름으로 떠오르면서, 남촌의 명동과 소공동의 색소폰 흐느끼는 소리는 졸지에 기성세대의 올드패션이 되어 버렸습니다.
목장길따라 밤길 거닐어
고운님 함께
집에 오는데
목장길따라 밤길 거닐어
고운님 함께
집에 오는데
스타도라 스타도라
스타도라 품파
스타도라 품파
스타도라 품파
스타도라 스타도라
스타도라 품파
스타도라 품파 품품품
M. 김세환 <목장길 따라>
당시 이 노래들이 유행하던 70년대 초에, 텔레비전에서는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이 한창 활동하고 있었고, 여전히 패티김과 이미자 같은 가수들이 인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점점 생뚱맞게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통기타 든 젊은이들의 인기가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들과 종로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 대중예술평론가 이영미씨는 “포크 음악이 당시 청소년에게 전혀 다르게 다가온 것은, 1970년대 초 종로에 있는 학교에 다녔던 청소년들은 전후세대라는 전혀 다른 문화적 맥락을 지닌 세대였기 때문”이라면서 “1950년대에 태어난 아이들, 식민지 경험이 없고 전쟁 경험도 없었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교과서적으로나마 배우고, 정부가 잘못하면 대학생 형들이 데모하는 게 당연한 걸로 아는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식민지 세대가 놀던 번화가 명동과 그곳이 중심이 대중음악은 너무 어른스러웠고 모든 게 비쌌고, 그들의 중심 지역은 인문계 중고등학교가 밀집해 있던 종로였다”는 것이다.
결국, 식민지시대에, 남촌 명동에 밀려서 그 위용을 잃어버렸던 북촌, 종로가, 탈식민의 시대, 광복과 전쟁 이후에 태어난 세대에 의해 다시 서울 문화의 중심으로 복귀하게 된 것이다.
어제는 비가 오는 종로거리를
우산도 안 받고 혼자 걸었네
우연히 마주친 동창생 녀석이
너 미쳤니 하면서 껄껄 웃더군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M. 이장희 <그건 너>
드디어 북촌의 종로가 화려한 재등장하는 장면이다. 주인공은 비가 오는 종로거리를 걷습니다. 거기서 만난 것은 학교 동창생이다. 이들은 세대는, 이제 가문이나 출신지역보다, 학교로 맺어진 학연이 훨씬 더 중요한 세대가 된 것이다. 이들 청년문화와 포크송을 선도한 것은, 서울의 대학생과 인문계 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가수 이장희는 “명동이 고급스럽고 전문화하고 특화된 작은 공간 느낌이었다면, 학생과 일반 대중들은 종로로 모였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쫙 퍼지고 다양한 대중적 공간이었고 당시 대중문화의 중심이었다”고 회상한다.
술집과 다방, 고급 양장점과 구두점이 밀집해있는 남촌의 명동과, 서점과 학원이 밀집해 있는 북촌의 종로, 그곳에서 다른 노래가 나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포크송은 바로 이들의 노래였다.
헤어지자 보내온 그녀의 편지 속에
곱게 접어 함께 부친 하얀 손수건
고향을 떠나올 때 언덕에 홀로 서서
눈물로 흔들어주던 하얀 손수건
그때의 눈물 자위 사라져 버리고
흐르는 내 눈물이 그 위를 적시네
M. 트윈폴리오 <하얀 손수건>
이 노래가 불렸던 음악감상실 세시봉은, 이제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다. 포크송이 종로2가 청소년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할지라도, 전문 가수가 되어 돈도 벌고 음반도 내고 방송 출연도 하려면, 기성세대들이 차려놓은 밥상에 들어갔어야 했고, 그건 아무래도 무교동 거쳐 명동의 음악감상실, 음악살롱들이었다. 무교동 세시봉, 종로에서 시작해서 명동으로 확장된 이종환의 쉘부르, 그리고 명동의 오비스캐빈 같은 곳이 그런 곳들이었다.
70년대 전반기에 포크의 인기가 급상승하면서, 새로운 유행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래서 70년대 후반부터는 아예 직업가수를 하려고 통기타 들고 무교동을 거쳐 명동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초기 포크의 아마추어적 신선함 같은 분위기는 많이 사라진 셈이지요. 조영남 씨는 이렇게 당시를 기억합니다.
말하자면 북촌에서 청년문화가 치고 올라온 이후에도 남촌의 명동은 여전히 힘을 쥐고 있었습니다. 명동은 기성세대의 공간, 어른들의 공간, 돈과 화려함과 권력이 있는 공간이었던 셈이지요.
M. 사월과오월 <어떤 말씀> 1절
대중가요계 사람들만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보통의 대학생들도 그랬어요. 평소에는 편안한 종로나, 학교 부근에서 놀다가, 주머니에 목돈이 좀 생기고 소개팅이라도 하려고 정장 차려입고 나갈 때에는 꼭 명동으로 갔습니다. 평소에 입지 않아 어색한, 그러나 비싸고 폼도 나는 정장, 그게 바로 그들과 명동의 관계와 같았던 거죠. 명동을 향한 이런 애증의 시선이 느껴지는 노래, 사월과오월의 <어떤 말씀>에 이어지는 서유석의 <파란 많은 세상>입니다.
명동거리 걸어가는 아가씨 마음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요
아 내 친구야 묻덜 말아라
너도 몰라 나도 몰라요
M, 서유석 <파란 많은 세상>
명동이 화려하긴 하지만 불편했던 이들. 그래서 이들의 마음의 고향은, 남촌의 명동이 아니라 북촌의 종로였다. 나이를 먹은 후에도 이들은 자신들이 학교를 다니고, 책을 사고, 가끔 기분이 나면 박인희 씨가 운영한다는 광화문에 있는 레코드가게에 들러 새로 나온 음반을 구경하고, 출출하면 그 위층의 덕수제과에서 단팥빵을 사먹었던, 그 시절을 생각하는 이들이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M. 이문세 <광화문 연가>
이문세 <광화문 연가> 속, 정동 언덕길의 교회당. 100년이 넘은 정동교회. 정동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한쪽은 이화여고, 다른 한쪽은 배재고등학교가 있었다. 그 정동교회 앞에는, 이 노래를 지은 이영훈을 추모하는 노래비가 자그마하게 놓여 있다.
이제 북촌의 학교들 태반은 강남으로 이사를 갔다. 학원들도 노량진으로, 강남역으로 다 가버렸다. 방송국도 여의도로 떠났다. 이제 약간의 외국어학원들만 종로3가에 남아있는 강북은 현재의 활동 무대가 아닌 노스탤지어의 공간이고, 이제 모두 세월 따라 떠나가는 곳으로 노래에서 그려진다.
(상략)
흰 눈 나리면 들판에 서성이다
옛사랑 생각에 그길 찾아가지
광화문거리 흰눈에 덮여가고
하얀눈 하늘 높이 자꾸 올라가네
M. 이문세 <옛사랑>
종로와 명동, 북촌과 남촌, 그 화해하지 못할 것 같았던 두 공간도, 이제는 그냥 ‘강북’이 되어 버렸다. 강남이 개발되면서, 그 두 곳은 모두 서울의 옛 거리로 치부되는 것이다. 열다섯 살 터울 지는 장남과 막내가, 자랄 때에는 엄청나게 세대차이가 나는 것 같았는데, 막상 조카가 태어나고 나니, 모두 똑같은 삼촌이고 똑같은 기성세대가 되는 것처럼.
일제가 들어와 북촌의 권위를 무너뜨리면서 남촌 명동의 화려한 번화가를 만들어놓고. 그 식민지 세대들에 저항했던 청년문화 세대들이 북촌 종로의 기운을 다시 회복시키고. 그러다 강남이 개발되면서 다시 강북 전체가 퇴락하고. 하지만 바로 그랬기 때문에 개발이 덜 된 이 북촌이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으로 남아서 지금도 우리를 위로하며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넣어주고 있다. 과거는 이렇게 살아남아 어우러지면서 빡빡한 현재의 삶에 숨 쉴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주고 있다.
CBS 라디오 음악다큐 기획특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