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명동성당과 조계사 등 종교시설은 정부와 대척점에 있는 인사들이 몸을 맡긴 단골장소였다. 죄인이 도망치더라도 잡아가지 못했던 삼한시대의 '소도'와 같은 역할을 한 셈이다.
특히 명동성당은 1980년대 재야·노동단체들의 농성장으로 '민주화의 성지' 또는 '최후의 보루'라고 불리기도 했다.
천주교나 조계종은 수배자의 은신을 암묵적으로 허용해왔으며 '성역'인 종교시설의 특수성을 들어 공권력 행사나 폭력행위 발생에 대해서는 난색을 표해왔다.
경찰은 시설 내에 들어가기보다는 주변에 병력을 배치하고 24시간 이들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등 검문검색을 강화하는 쪽으로 대응했다.
2009년 1월 발생한 '용사참사'와 관련 불법 집회 주도 등의 혐의로 수배된 용산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 등 시민단체 인사 3명은 같은 해 9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약 4개월간 명동성당에 머물렀다.
수배자 신분이었던 이들은 희생자들의 장례식과 삼우제를 치른 후 경찰에 자진 출석, 구속됐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협상을 촉구하는 촛불집회가 이어지던 2008년 여름에는 집시법 위반 혐의로 수배된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간부와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 등 6명이 조계사에 짐을 풀고 농성했다.
당시 조계사 주변에서 검문검색을 벌이던 경찰이 총무원장인 지관 스님의 차량에 대한 '과잉 검문'을 벌여 당시 정권의 종교편향 논란으로 불똥이 튀기도 했다.
정작 수배자들은 농성 120여일만에 경찰의 눈을 피해 조계사 밖으로 몰래 빠져나갔고, 약 열흘 뒤 강원도 동해의 한 호텔에서 검거됐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민주화 운동보다는 노조 파업이 잦아지고 시설 내 농성 등이 장기화하면서 교단 측이 강경한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2000년 12월 명동성당은 한국통신 노조원의 농성으로 신자들의 불편이 가중되자 노조 측에 퇴거를 요구하고 경찰에 시설보호를 요청했다.
이후 2001년 7월 수배 중인 민주노총 당시 단병호 위원장의 단식 농성, 2002년 2월 철도·가스 노조원의 농성, 같은 해 10월 보건의료 노조의 농성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명동 성당 측은 "수배자를 위한 일시적인 피신처의 역할을 하지만, 수배자가 아닌 노조의 이해와 요구를 위한 파업 농성을 더이상 용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2002년 3월에는 경찰이 조계사 법당까지 들어와 농성 중이던 발전노조원을 체포해 신도들이 반발, 서울경찰청장이 사과하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총무원 측에서 경찰투입을 요청한 것으로 확인돼 논란이 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