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통의 세계적 프로 아이스하키 리그인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는 25일(현지시간) 자체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재한 일요판 특집기사에서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팀 국가대표로 활동했던 탈북자 황보 영(35)씨를 이렇게 소개했다.
NHL은 황보 씨가 지난 2011년 선수생활을 은퇴했지만 오는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아이스하키 대사'로 떠오르면서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며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조명했다.
체육인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스포츠 활동을 했던 그는 처음에는 북한에서 인기가 높은 체조를 선택했지만 12살때 아이스하키 국가대표 코치에 의해 선수로 발탁됐다.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탈출했고, 1999년 한국에 도착한 이후 하키를 다시 시작했지만 '탈북자'라는 꼬리표 때문에 처음에는 쉽지 않은 선수생활을 했다.
그러던 그가 명실상부한 '한국 국가대표 선수'로 새로 태어난 계기는 2005년 뉴질랜드에서 열린 국제아이스하키협회(IIHF) 주최 여자 세계선수권대회 4부 리그였다고 한다.
한해 전인 2004년 슬로베니아 대회의 3부 리그에서 5전 5패의 수모를 당한 뒤 최하 그룹인 4부 리그로 내려앉은 한국팀은 뉴질랜드에서 아이슬란드를 상대로 첫 국제대회 우승의 감격을 맛봤고, 황보 씨로서는 처음으로 아이스링크에 울려 퍼지는 애국가를 들었다.
그는 "한국에서도 경기를 했지만 애국가를 한 번도 듣지 못했는데 뉴질랜드 대회에서 처음 애국가를 들었다"면서 "너무나도 감격적인 순간이었다"고 떠올렸다.
황보 씨는 자신의 선수생활 중에 가장 가슴이 아팠던 경험은 2003년 일본 아오모리(靑森)에서 열린 겨울 아시안게임이었다고 소개했다.
역사적인 남북대결 이후 과거 함께 운동했던 북한 동료선수들이 손을 내밀며 인사하는 자신을 외면했던 기억 때문이다. 그는 "가슴이 찢어졌다"면서 "그렇지만 내가 다가가서 말을 걸었을 때 그들이 북한으로 돌아가 처벌을 받을 것이 걱정됐다"고 말했다.
황보 씨는 이후 잇단 활약으로 한국 대표팀 주장이 되기도 했지만 특별한 소득이 없었던 탓에 낮에는 치과위생사로 일하면서 밤에 연습을 했고, 어린 후배들을 보살피면서 '어머니'로 불렸다고 NHL은 전했다.
NHL은 "운동선수들이 세계무대에서 빛을 발할 기회가 거의 없는 북한에서도 희망스토리가 있고, 탈북을 통해 새로운 삶을 찾은 사람들의 희망스토리도 있다"면서 "황보 영이 그 사례"라고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