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없는 "통일대박"에 윤병세 발언 빌미

이산가족상봉 문제 패키지화 재요구...南에 다시 공 넘겨

윤병세 외교부 장관. 윤창원 기자/자료사진
북한이 9일 박근혜 대통령의 설 이산가족상봉 제안을 거부한 배경에는 '어떻게' 없는 통일 대박론이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이다. 안그래도 북한은 금강산관광 문제와 분리된 이산가족상봉 제안에 떨떠름했는데, 최근 북한 급변사태를 전제한 한국 주도의 통일론이 우리 정부의 속내인 것처럼 비치는 일이 잇따라 벌어지면서 거부의 명분을 마련한 셈이다.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이 이날 판문점을 통해 우리 측에 전달한 통지문에서 상봉행사 거부 이유로 눈에 띄는 대목 중 하나는 "언론과 전문가, 당국자들까지 나서 무엄한 언동을 하였다"는 부분이다. 무엄한 언동은 무엇을 가리킬까.

바로 전날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존 케리 미 국무부 장관과의 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6자회담과는 별도로 북한 정세를 논의하는 고위급 협의를 갖겠다고 밝히면서 북한 급변사태, 즉 북한 붕괴를 염두에 두는 듯한 인상을 줬다. 이와 관련해 정부 고위당국자는 논의 범위에 "컨틴전시 플랜(북한 급변사태에 대한 대응책)도 배제하지 않는다"고 했고 논의 목표에 대해서도 '북한의 변화'라고 설명했다.

남재준 국정원장이 지난 해 말 '2015년 통일 가능성'을 언급한 데 이어 윤 장관의 관련 발언이 나오자 일각에서는 정부가 북 정권붕괴론을 염두에 둔 게 아니냐는 해석이 잇따랐다. 남한 주도의 흡수통일, 북한 입장에서 '잡아먹히는 통일'은 북한이 강하게 반발하는 시나리오다. 이명박 정부 때는 이 논리가 대북정책을 지배하면서 실제 남북 경색 국면을 이끌기도 했다.


사진=청와대 제공
통지문은 또 박 대통령의 6일 신년기자회견을 들어 "조선(북한)이 제기한 원칙적 문제들에 대해 핵문제를 내들며 동문서답하면서 종래의 대결적 자세에서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는데 대해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통일 대박'을 이야기하면서 통일까지 '어떻게' 가자는 비전은 설명하지 않고 북핵 문제를 강조해, 당시에도 역시 북 급변사태를 염두에 둔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었다.

이런 맥락에서 북한은 박 대통령과 정부 당국자들이 북한 붕괴론에 근거한 대북 정책을 펼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했을 거란 분석이다. 통일부 당국자는 북한의 거부 배경에 대해 "심층적 검토가 필요하다"면서 앞서 한미 외교장관 회담 등이 이번 북한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묻는 질문에 "여러가지가 원인이 됐을 수 있다"고 답했다.

금강산관광 문제와 이산가족상봉 행사를 주고받기 식으로 해결하려던 북한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분리 원칙을 확인한 정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측면이 있다. 다만 이산상봉이 철저히 인도적 사안인 만큼 곧바로 걷어차는 데 대한 부담이 있던 차에, 정부가 일종의 빌미를 제공해 준 셈이다.

조동호 이화여대 교수는 "박 대통령의 '통일 대박'이나 정부의 통일 논의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관계개선에 대한 방법이 완전 생략돼 있기 때문에, 북한 입장에서는 우리 정부의 진정성에 의심을 품었을 것"이라며 "그러면서 정부가 이산가족상봉을 제안한 것은, 북측을 향한 것이라기보단 한국 내 보수층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남북 모두 서로의 진정성을 확인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북측은 한국의 군사훈련 시기가 지난 뒤 자신들의 제안도 함께 협의한다면 상봉행사가 가능하다고 남측에 공을 넘겼다. 여기서 '자신들의 제안'은 금강산관광 문제로 보인다. 지난 해 추석계기 이산가족상봉 행사도 금강산관광과 함께 엮으려다 실패한 북한이 일방적으로 취소했었다.

한편 북측은 "앞으로도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통지문을 마무리지으면서, 여지를 확실히 뒀다. 통지문 전반의 톤도 부드러워서, 한때 박 대통령의 실명을 거론하며 비방할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이는 장성택 처형으로 정치적 기반 다지기를 마무리한 김정은 제1비서가 경제 살리기를 위해 남북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인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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