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도둑들은 현장에서 찍은 스틸(Still)이 본 포스터로 사용돼 흥행에도 일조했다. 김윤석 김혜수 이정재 전지현 김수현 등 10명의 톱스타가 골목에서 일렬로 서서 걸어오는 그 사진 말이다.
"당신의 소중한 돈을 지켜드립니다"라는 카피와 함께 송강호가 활짝 웃고 있는 '변호인'의 캐릭터 포스터도 한 작가의 작품이다.
스틸 작가의 기본 업무는 영화의 홍보와 기록을 위해 현장에 투입돼 영화의 주요 장면을 찍는 것이다. 그들이 찍는 수만장의 사진은 영화 개봉을 앞두고 엄선돼 대중에게 공개된다.
하지만 잘나가는 스틸작가 중 한명인 한 작가는 영화의 정수를 한 장의 사진에 녹아내는 탁월한 능력으로 이렇게 예정에도 없는 포스터 사진도 찍어낸다. 영화 마케터들이 우선 순위로 그를 섭외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동안의 발자취는 놀랍다. 1999년 '해피엔드'를 시작으로 '공동경비구역JSA'(2000) '살인의 추억'(2002) '올드보이'(2003) '친절한 금자씨' '괴물'(2005)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도둑들' '관상'(2013) 그리고 '변호인'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를 찍었다.
■ 영화스틸, 감정을 찍는다
최근 영화 '표적' 촬영장에서 만난 한 작가는 일주일째 집에 못들어갔는지 초췌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사진을 한장이라도 더 보여주고 싶은지 노트북에 담긴 미공개스틸을 보여주는 손놀림은 분주했다.
금방이라도 사진을 뚫고 어디론가 달려갈듯 역동적인 정우성의 모습(놈놈놈)은 패션화보처럼 멋졌고, 관상에서 송강호가 모든 것을 잃고 성문 앞에 망연히 서있다 오케이 사인을 받고 두 팔을 번쩍 들어올린 모습에서는 당시 배우의 심경이 전달돼 웃음이 났다.
한 작가는 "단체 컷은 기회가 되면 습관적으로 찍는다"며 "기록의 의미도 있고 나중에 흥행이 잘되면 활용도도 높은데, 특히 이렇게 미소 짓는 사진은 언제봐도 기분이 좋다"고 했다.
도둑들의 골목길 사진은 어떻게 찍었냐고 물으니 그는 "정말 엄청나게 더운 날이라 배우들도 지친 상태였는데 본능적으로 이건 찍어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운을 뗐다.
이어 "다행히 안수현 대표가 마케팅을 한 제작자라 내 제안을 듣고 잠시 생각하더니 함께 만들어보자고 했다"고 적확한 판단으로 기회를 잡았던 당시를 회상했다.
"배우들이 서는 순서만 정했다. 워낙 베테랑 배우들이라 각자 캐릭터에 맞게 알아서 걸어오라고 했다. 딱 두 번 찍었다."
하지만 이런 요구가 허용되지 않는 현장도 있다. 영화 찍기도 바빠 죽겠는데 스틸 작가를 위해 따로 포즈를 취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스틸은 기본적으로 감독이 슛을 외치면 찍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최대한 영화 촬영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요령껏 찍어야 한다. 한 작가의 경우 변호인부터 카메라 셔터 소리를 줄여주는 덮개를 씌우고 일부 장면에 한해 촬영 중에도 사진을 찍으나 여전히 카메라가 돌아가면 절대 사진을 찍지 말라는 규칙이 통용된다.
감독이 컷을 하면 배우들이 알아서 포즈를 취해주거나 몇몇 감독은 따로 기회를 주나 기본적으로 없는 듯 알아서 찍어야 한다. 그러다보니 가끔 스태프들에게 "현장스틸이 시간 달라고 하냐" "빨리 찍고 나와라"등 싫은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는 현장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으로 연차가 낮은 막내를 꼽았다. 초짜들은 충무로 15년차 스틸작가 한세준의 얼굴을 모를 뿐만 아니라 무조건 "빨리 하라"고 채근하기 때문이란다.
"과거 신인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를 한다니까 한 제작자가 이런저런 요구를 쉽게 할 수 있을테니 원하는 사진을 다 찍을 수 있겠다고 하더라. 근데 결코 그렇지 않다. 연기가 서툴면 사진이 안 나온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를 찍어야 좋은 사진이 나온다."
그가 배우의 연기를 유심히 지켜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떤 대사를 할 때 좋은 감정이 나왔는지 기억해둔다. 그리고 필요시 그 대사의 감정을 재연해달라고 부탁한다. 변호인까지 7개 작품을 함께 한 송강호는 알아서 척척 해준다. 송강호는 내가 왜 자기 앞에 서있는지를 안다."
지금껏 지켜본 최고의 배우를 묻자 한 작가는 송강호와 정우성을 꼽았다. "송강호는 감정이 풍부하고 연기를 잘해서 다양한 사진이 나온다. 정우성은 1장을 찍어도 멋있고 100장을 찍어도 멋지다."
그는 배우의 감정 연기를 보면서 영화의 흥행도 점친다. 누구도 흥행을 예상치 못했던 살인의 추억과 정치적 논란이 우려됐던 변호인이 대표적.
"살인의 추억은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 중 하나인데, 당시 현장의 진지함이 좋았다. 송강호에게 당시 500만 이상 든다는 말도 했다. 그렇게 어떤 진심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살인의 추억도 그랬고 변호인도 그랬다."
포털사이트에서 살인의 추억이나 올드보이, 변호인을 검색해 보도스틸을 한번 보라. 모든 사진이 극적이고, 배우들의 표정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변호인을 홍보마케팅한 퍼스트룩의 강효미 실장은 "인물이 같으면 사진이 비슷할 수 있는데, 변호인의 송강호 사진은 다 달랐다"며 "한세준 작가는 장면의 감정이나 영화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인물의 감정을 잘 포착해낸다"고 칭찬했다.
일단 작품을 맡으면 현장에 상주하면서 최대한 많이 찍는 것도 한 작가의 방식이다. 배우에게서 언제 최적의 감정이 나올지 모르니까 계속 찍는다.
현장의 급박한 상황에 밀려 쉽게 포기하기보다 끊임없이 스태프들과 배우들에게 협조를 구하는 것도 중요하다. 기본은 자신만의 생각과 의도를 갖고 찍는 것이다.
한 작가는 "같은 현장이라도 누가 찍는냐에 따라 사진이 달라진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성실한 자세로 끊임없이 주위를 어슬렁거리면서 스틸 작가만의 시점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영화 '늑대소년을 작업할 때다. '죽기 전에 봐야 할 영화 500선'이란 책이 소품으로 책장에 꽂혀있어 들춰봤더니 한국영화는 올드보이와 괴물 두 편이 선정돼있었다.
두 영화 모두 한세준 작가가 작업했다. 뿌듯하면서도 씁쓸했다. 다른 스틸에는 전부 사진 작가의 이름이 적혀있는데, 두 영화만 제작사가 명기돼 있어서다.
"나중에 우리 애들이 이 책을 봤을 때 아빠 이름이 적혀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애들도 모를 것을 생각하니 씁쓸했다."
2차 사용에 따른 비용 지급 문제도 아쉬운 점이다. "개선되고 있는데 과거 현장스틸이 포스터로 발탁돼 사용됐는데 추가 비용을 못 받는 경우가 있었다. "
스틸작가 중에서는 몸값이 최고 수준인데도 그는 여전히 자신을 "생계형 스틸작가"라고 했다.
"'해피엔드'를 500만원 받고 시작했는데 이후 일을 맡을 때마다 최소 100만원이라도 더 받으려고 했다. 그래야 생계가 해결돼 직업이 유지되고 일의 질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맡은 영화가 흥행에 잇따라 성공하면서 한때는 제작비 규모에 따라 5-8배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2007년 거품이 빠지고, 편당 개런티가 10년 전 수준으로 하락했다.
그는 "2007년 한국영화가 어려워지면서 인건비가 30%정도 삭감됐다가 지난 몇 년 조금씩 만회가 됐는데, 요즘 잘하는 친구들도 생겨났고 상한선이 있어서 그 이상을 요구할 수도 없다"며 쌓인 경력에도 크게 나아지지 않는 임금수준을 꼬집었다.
몇 년 전에는 속상한 일도 겪었다. 투자배급사와 무려 10개월 전부터 구두약속된 상태였는데 주연배우가 선호하는 스틸작가를 고집하면서 일이 틀어져 한 6개월 무직상태로 지냈다.
한 작가는 "상황이 꼬이면서 경제적으로 힘들었다"며 4대 보험도 보장되지 않는 프리랜서의 고충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