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률의 소치 레터]여왕이여! 왜 울지 않은 겁니까?

'태극 피겨 여왕' 김연아가 21일(한국 시각) 소치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 프리스케이팅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뒤 태극기를 들고 세리머니를 펼치고 있다.(소치=대한체육회)
소치올림픽의 꽃 피겨 여자 싱글 경기가 끝났습니다. 21일(한국 시각) 러시아 소치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팰리스에서 열린 프리스케이팅 경기. 피겨 여신들의 우아한 몸짓과 환상적인 점프, 애절한 표정이 얼음판을 수놓았습니다.

여러 선수들의 뜨거운 눈물도 얼음판을 적셨습니다. 기쁨과 슬픔, 회한... 저마다 의미는 달랐습니다.

가장 먼저 본 눈물은 김해진(17, 과천고)의 것이었습니다. 프리스케이팅 연기 도중 펜스에 부딪혀 넘어진 김해진. 첫 올림픽에서 나온 불의의 실수에 대한 안타까움과 기회를 준 언니 김연아(24)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하염없이 흘렀습니다.

김연아는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동계올림픽 출전 티켓 3장을 확보해 김해진, 박소연(17, 신목고) 등 후배들과 함께 소치에 왔습니다. 김연아 덕에 올림픽에 올 수 있었던 김해진은 스스로 "어이없는 실수를 했다"며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두 번째는 아사다 마오(24, 일본)의 눈물이었습니다. 전날 쇼트프로그램에서 엉덩방아를 찧는 부진을 보인 아사다는 이날 프리스케이팅에서 혼신의 연기를 펼쳤습니다. 성공률이 높지 않은 필살기 트리플 악셀을 비롯해 전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멋진 연기를 보였습니다.

경기를 마친 아사다는 서럽게 울었습니다. 전날 쇼트프로그램 16위(55.51점), 일본 팬들의 비난 등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이날 프리스케이팅에서 전날 부진을 만회한 뒤 흘린 눈물에 대해 아사다는 "어제 연기가 유감이었고 분했다"고 털어놨습니다.

'언니, 미안해요' 김해진은 프리스케이팅 경기에서 불의의 실수로 제 실력을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과 선배 김연아에 대한 미안함으로 눈물을 쏟았다.(소치=임종률 기자)
마지막 눈물의 주인공은 금메달리스트 아델리나 소트니코바였습니다. 이날 프리스케이팅에서 '인생 경기'를 펼친 소트니코바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점수도 무려 149.95점, 김연아가 4년 전 밴쿠버올림픽에서 세운 역대 프리스케이팅 최고점(150.06점)에 불과 0.11점 모자라는 점수에 절로 눈물이 흘렀습니다.

김연아는 울지 않았습니다. 밴쿠버올림픽 못지 않은 연기에도 144.19점, 쇼트프로그램(74.92점)까지 합계 219.11점으로 소트니코바에 5점 이상 뒤졌습니다. NBC 등 외신들이 앞다투어 판정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할 정도의 점수.


외국 기자들은 한국 취재진에게 유감의 뜻을 전했습니다. 러시아의 홈 텃세와 판정으로 김연아에 피해를 입었다는 겁니다. 한 기자는 "최악의 스캔들"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 자원봉사자들조차 "소트니코바는 아직 어리다"면서 "김연아가 더 잘 했다"고 오히려 저를 위로했습니다.

본인은 오죽했을 겁니까? 어쩌면 4년 동안의 방황과 좌절, 또 결심, 그리고 노력이 물거품이 됐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석연찮은 판정에 그 노력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면 목구멍에 이만한 게 올라올 겁니다.

그러나 김연아는 대신 씩씩하게 웃었습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김연아는 "결과에 만족 안 하면 어떡하죠?"라고 반문하며 아쉬워 하는 취재진을 오히려 웃겼습니다. 이어 "점수는 기대하지 않았고, 고생해서 준비한 만큼 다 보여드릴 수 있던 것 같아서 끝나서 행복하다"고 환하게 미소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뿌듯한 점수를 매겼습니다. 100점 중에 120점. 완벽하기로 소문난 김연아가 이 정도 점수를 줄 정도라면, 이건 대단한 일입니다.

'난 몇 점을 줘야 하지?' 김연아가 21일(한국 시각) 소치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에서 은메달을 따낸 뒤 인터뷰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골똘히 답변을 생각하고 있다.(소치=임종률 기자)
김연아는 이번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에 대해 "밴쿠버올림픽과 달리 딱히 정해놓은 목표가 없다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습니다. "밴쿠버 때는 금메달 아니면 진짜 목숨을 걸 수 있을 정도였지만 선수로서 가장 큰 목표 이룬 다음에는 간절함이 덜해 동기부여가 안 된 부분이 가장 힘들었다"는 겁니다.

그 목표의 상실과 허탈감 속에 찾아온 2년의 방황을 극복하고 어려운 두 번째 올림픽 도전을 마친 자신이 스스로 대견한 겁니다.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체력적, 심리적 한계를 느꼈지만 그걸 이겨냈다는 데 120점을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저처럼 세속적인 사람들은 금메달이 아쉬울 겁니다. 만약 같은 이유로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면 억울함에 눈물을 쏟아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김연아는 정말로 메달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자신을 평가해 내리는 점수도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다만 김연아 본인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김연아에게 내리는 점수에 더 큰 의미를 뒀습니다.

'부덕의 소치' 올림픽 금메달보다 어쩌면 더 값진 결실이 아닐까요? 이제 왕관을 내려놓는 피겨 여왕 김연아가 울지 않은 이유를 생각하며 올림픽의 의미를 또 한번 되새겨봅니다.

p.s-김연아는 일부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이른바 '짜다' 발언에 대해서도 해명했습니다. 전날 키스 앤 크라이 존에서 쇼트프로그램 점수를 확인한 뒤 김연아가 한 혼잣말이 '(점수가) 짜다'는 모양이었다는 겁니다. 이에 김연아는 "'짜다'가 아니라 '끝났다'고 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짜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떻습니까? 이제 여왕의 재위(在位)는 끝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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