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권력공백'…야권 집권이냐, 국가분열이냐

시위 석달 만에 야권으로 '실권 이동'…러시아 대응 주목

우크라이나 사태가 22일(현지시간)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수도 키예프를 떠나고 야권이 정국 주도권을 잡으면서 반정부 시위 3개월 만에 최대 고비를 맞았다.

정국 주도권은 야권으로 빠르게 기우는 모양새지만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도피로 생긴 '권력 공백'이 또 다른 위기상황으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

최악에는 친(親) 러시아·여권 성향의 동남부 지역과 친유럽·야권 성향인 서부지역에 별도의 정권이 수립돼 국가 분열로 치달을 가능성도 나온다.

◇ 반정부 시위 3개월 만에 야권 실권 장악 = 우크라이나의 반정부 시위는 지난해 11월 말 야누코비치 정권이 자유무역협정(FTA)을 포함한 유럽연합(EU)과의 포괄적 협력협정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시작했다.

러시아계가 우세한 동남부와 친유럽 성향의 서부지역 간의 갈등이 뿌리깊은 상황에서 동남부 기반의 야누코비치 정권이 EU와의 경제 통합을 무산시키자 서부 주민과 젊은 세대가 강하게 반발, 키예프 등에서 대규모 시위를 이어왔다.

석 달여 혼란 끝에 지난 20일에는 시위대와 진압경찰의 충돌해 100명 넘게 숨져 사태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에 EU와 러시아 대표가 중재에 나섰고, 여야가 21일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는 개헌과 조기 대선 등을 골자로 하는 타협안에 합의하면서 사태는 일단락하는 듯했다.

그러나 타협안이 체결된 날 저녁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수도를 떠나 동부도시로 도피했고, 야권이 최고 의회인 라다를 장악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 야권 주도 의회 주요 정부기관 수장 임명 = 우크라이나 야권은 이날 여당 측 의원이 불참한 가운데 열린 의회 총회에서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퇴진 안건을 통과시키고 5월25일 조기 대선을 실시하기로 했다.

의회는 또 최대 야당 '바티키프쉬나'(조국당) 부당수 알렉산드르 투르치노프 의원을 새 의장으로, 역시 바티키프쉬나 소속 의원으로 동부 하리코프주 주지사를 지낸 아르센 아바코프를 내무부 장관 대행으로 각각 선출했다.

아바코프 내무장관 대행은 "내무부가 야권 시위대로 넘어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반정부 시위 과정에서 체포된 야권 인사 모두를 석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밝혔다.

의회는 또 이날 국가보안국장, 검찰총장, 국방장관 등 권력기관 수장들도 임명했다. 앞서 의회 결의로 복원된 '2004년 헌법'에 따라 이들 권력기관 수장은 대통령의 지명과 의회 승인 절차를 밟아야 한다.

의회는 대통령의 지명이 불가능한 상황을 고려해 새로 임명된 이 기관 수장들에 해당 기관의 '활동 통제 전권대표'란 직함을 부여했다.

국방부 전권대표엔 블라디미르 자마나, 검찰 전권대표엔 극우민족주의 성향 야당 '스보보다'(자유당) 소속 의원 올렉 마흐니츠키, 국가보안국 전권대표에는 또 다른 주요 야당인 '개혁을 위한 우크라이나 민주동맹'(UDAR) 소속 의원 발렌틴 날리바이첸코를 각각 임명했다. 날리바이첸코는 2005~2010년 보안국 국장을 지낸바 있다.

우크라이나 외무부는 이날 야누코비치 정권에서 장관직과 장관직 대행 업무를 수행해온 레오니트 코좌라 대신 새로운 장관을 임명해 달라고 의회에 요청했다. 110여명의 외무부 직원들은 자체 결의안을 통해 "콰좌라 대행이 대내외적으로 신임을 잃어 더이상 장관직을 수행할 수 없다"며 이같이 요청했다.

직권남용죄로 복역하다 이날 의회 결의로 석방된 야권 최고 실력자 율리야 티모셴코 전 총리도 대선 출마 의사를 밝히는 등 야권이 주도권을 잡아가는 모습이다.

◇ 동-서 분열, 2개 정부 수립 가능성도 제기 = 하지만 야권이 무사히 새 정부 구성을 마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이날 현지 방송 인터뷰에서 의회의 결정을 '쿠데타'라고 비난하면서 자신은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며 사임할 의사가 없다고 강조했다.

러시아의 흑해함대가 주둔해 있고 러시아계 주민이 많은 남부 크림반도 지역에서도 의원들이 자치권과 러시아의 '보호'를 요구하고 나섰다고 뉴욕타임스(NYT)가 전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소재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나 지지기반인 동부 도네츠크주에 머무는 것으로 알려졌다.

NYT는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동남부 러시아계를 중심으로 독자세력을 형성한다면 수도를 장악한 야권은 '독립성' 유지를 위해 무력 대응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며, 최악에는 두 개 이상의 정부가 대립하며 유고슬라비아 방식의 국가분열이 일어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도 키예프의 반정부 시위대가 야권 지도자들 역시 신뢰하지 않는다면서 정국 불안이 이어질 것으로 진단했다.

◇ 불확실한 러시아 입장…푸틴 반응 주목 =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들은 티모셴코의 석방을 일제히 환영했지만, 우크라이나 여권을 지지하는 러시아는 아직 뚜렷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이날 독일·프랑스·폴란드 외무장관에게 전화해 우크라이나 야권의 행보를 비난했다고 외신들이 보도했지만 러시아의 공식적인 반응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사태 발발 이후 서구권의 개입을 비판하며 우크라이나 내정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면적으로 유지해왔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상황이 급변하면서 러시아도 대응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고 외신들은 지적했다.

우크라이나의 '혁명'이 성공해 새 정권이 들어서면 2000년 이후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이 애써 확립한 옛 소련권 관리 체제에 심각한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인디펜던트는 야권이 주도권을 잡은 우크라이나의 상황이 러시아엔 '악몽'과 같다면서 특히 러시아인 대부분이 우크라이나를 '친척 국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러시아로의 '도미노 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뉴욕타임스는 소치 올림픽을 맞아 온건한 국가 이미지를 심는 데 집중하던 푸틴 대통령이 23일 올림픽 폐막 이후 우크라이나 사태에 주의를 쏟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 경제위기 등 산적한 과제 = 어느 쪽이 우크라이나의 차기 정권을 잡더라도 파탄 상태인 경제상황을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된다.

인디펜던트는 우크라이나의 외화보유고가 180억달러(19조원)에도 못 미치며 환율도 계속 떨어져 당장 부채상환에 필요한 자금만 100억달러(10조7천억원)를 넘는다고 보도했다.

블룸버그통신도 우크라이나가 내년 말 기한인 부채 170억 달러(약 18조원)에 대한 채무불이행(디폴트)을 피하려면 외부 자금 조달이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러시아는 그러나 20일 우크라이나 정국 위기가 계속되면 지난해 약속한 차관 지원을 중단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G20 재무장관 회의에 참석한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22일 우크라이나에 대한 차관 지원을 연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지난주 우크라이나에 대한 20억 달러 추가 차관(지난해 약속한 150억 달러 차관 2차분) 지원 문제를 논의했었지만 이후 우크라이나 정치 상황이 급변한 만큼 어떤 정부와 협력할지를 지켜봐야 한다"며 "우크라이나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길 기다려 이 정부의 정책 방향을 파악한 뒤 어떤 조처를 할 지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과 독일 등 서유럽 국가들은 국제통화기금(IMF)를 통해 우크라이나에 금융지원을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으나 외부 자금을 지원받더라도 디폴트 위험은 여전하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외교·안보분야 싱크탱크인 유럽외교관계이사회(ECFR)의 마크 레너드는 NYT에 "우크라이나는 파산상태이고 정부 시스템은 끔찍하게 무너졌으며 부정부패는 광적인 수준"이라며 "누구도 우크라이나가 가진 문제를 끌어안으려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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