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률의 소치 레터 후기②]김연아가 그때 그 질문의 진의를 알았더라면...

소치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 결과는 달라졌을까

'그래도 자랑습니다' 김연아는 소치올림픽에서 석연찮은 판정으로 대회 2연패가 무산됐다. 개최국 러시아의 홈 이점이 가장 컸지만 판정에서 김연아 본인과 관련한 부분도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사진은 피겨 여자 싱글 시상식을 마친 뒤 태극기를 들고 관중 환호에 답하는 모습.(자료사진=대한체육회)
소치 레터 후기, 그 두 번째는 조금은 민감한 주제입니다. 바로 피겨 여왕 김연아(24)와 관련된 얘기입니다. 소치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 결과에 대한 한국 내 공분이 워낙 거세 대회 기간 중에는 무척이나 망설이다 말았던 기사입니다. 다른 쓸 것들이 많아서 넘어간 부분도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이제 대회도 끝났고, 아쉬움은 여전히 남지만 상황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지 않았나 싶어 노트북에 담아놨던 기사를 다시 꺼내 마무리를 해보려고 합니다.(그럼에도 혹시라도 있을 후폭풍을 어떻게 감당할까 싶어 두려움은 남습니다.)

김연아가 소치올림픽에서 금메달이 아닌 은메달을 목에 건 데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완벽한 연기를 펼치고도 개최국 러시아의 아델리나 소트니코바에 밀린 것은 판정의 문제가 분명하다는 겁니다.

'피겨 전설' 카타리나 비트(독일), 미셸 콴 등 전문가들과 미국 NBC, 프랑스 레퀴프 등 세계 유수의 언론들도 지적한 부분입니다. 판정에 대한 재심사 청원에 약 200만 명이 서명했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저 역시 이런 관점에서 기사를 적잖게 썼고, 현장에 있던 외국 기자들도 석연찮은 판정을 꼬집었습니다.

다만 경기에 앞서 한 외신 기자가 김연아에게 던졌던 질문이 아직도 못내 마음에 걸립니다. 쇼트프로그램 전날 훈련 뒤 인터뷰 때 나온 "모두가 밴쿠버올림픽 때의 훌륭한 연기를 기억하고 있는데 심판들이 그때와 현재의 김연아를 비교할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소치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 경기에 앞서 김연아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던 미국 시카고 트리뷴의 필립 허쉬 기자. 그는 인터뷰 뒤 "내 질문이 그렇게 어려웠느냐"며 웃었다. 그의 애정어린 우려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사진=필립 허쉬 트위터)
질문을 던진 사람은 미국 시카고 트리뷴의 필립 허쉬 기자. 피겨만 38년을 취재한 베테랑으로 김연아에 대한 호의적인 기사로 국내 팬들에게도 적잖게 알려져 있습니다.(CBS노컷뉴스 2월18일자 ''피겨 퀸' 김연아 애먹인 38년 美 베테랑 기자' 기사 참조)

질문의 뜻은 여자 피겨 사상 역대 최고점(228.56점)을 올렸던 4년 전 환상적인 연기를 한 것이 오히려 부담이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의 김연아를 기억하는 심판들이 기대감에 부풀어 판정의 기준을 4년 전으로 돌린다면 '현미경 잣대'를 들이밀지 않겠느냐는 것으로도 해석되는 질문이었습니다.

당시 김연아는 이 질문의 의미를 곧바로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웬만한 영어는 알아듣는 김연아였지만 통역의 도움을 받아야 했을 만큼 난해했습니다. 저 역시 이후 녹음된 파일을 몇 번 듣고서야 겨우 질문의 요지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제 영어 듣기도 어디 나설 정도는 아닙니다. CBS노컷뉴스 3일자 '[임종률의 소치 레터 후기①]김치를 담가 주겠다던 '러 美女의 두 얼굴'' 기사 참조)

그때 김연아는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나만 특별히 그런 점은 없을 것 같다"고 넘겼습니다. 다만 4년 전 기량과는 같지 않은 점은 인정했습니다. 김연아는 "같은 올림픽이라 밴쿠버 때와 많이 비교를 하는데 그때가 조금 더 전성기였지 않을까 싶고 지금과 비교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물론 김연아 본인도 허쉬 기자의 질문이 무엇을 묻는지는 알았을 겁니다. 하지만 판정에 대해 김연아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부분은 없었을 겁니다. "밴쿠버 때와 같은 실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지만 지금은 내 자신만 생각한다"고 강조하며 최선을 다짐하는 것 외에는.

허쉬 기자의 질문과 김연아의 답을 곰곰이 되새겨 보니 올림픽 2연패 무산의 이유가 어쩌면 거기에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최고의 김연아를 기억하고 기대했던 심판들이 전성기가 살짝 지난 김연아에 대해 약간의 실망감을 갖진 않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 질문의 진의를 알았더라면 과연 사진 속 순서는 달라졌을까' 김연아와 러시아 아델리나 소트니코바, 이탈리아 카롤리나 코스트너(왼쪽부터) 등 소치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 메달리스트들이 시상대에 선 모습.(자료사진=대한체육회)
사실 이번 대회에서 김연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선수들은 후한 점수를 받았습니다. 소트니코바는 무려 20점 이상 개인 최고점을 경신하는 '점수 인플레'를 경험했고, 일본 아사다 마오도 쇼트프로그램의 부진을 딛고 프리스케이팅에서 142.72점의 개인 최고점을 찍었습니다. 당초 기대치가 낮았던 선수들이 기대 이상의 연기를 펼치자 의외로 점수가 높아졌을 수 있습니다.

반면 김연아의 점수는 상대적으로 박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완벽한 스텝 연기에도 레벨4가 아닌 3을 받았고, 정확한 점프를 했음에도 적잖은 요소에서 가산점(GOE)이 1점대 초반, 예상 외로 낮았습니다. 올림픽이 끝난 뒤 4일 팬 미팅에서 김연아도 "(점수에) 어이는 없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소트니코바에 대한 편파적인 퍼주기 의혹이 짙지만 4년 전과 지금의 김연아에 대한 심판들의 비교도 영향을 미치진 않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기대치가 워낙 높았던 김연아는 판정의 기준점부터 다른 선수들보다 달랐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소트니코바 우승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쪽(주로 러시아 언론)의 주장은 김연아가 너무 안정적, 소극적인 경기를 했다는 겁니다. 새로운 것 없이 안정을 추구하며 무리하지 않고, 본인이 할 수 있는 부분만 했다는 것인데 이에 비해 소트니코바는 도전적인 연기로 기존 자신의 모습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인 게 컸다는 의견입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김연아는 소트니코바보다 3회전 점프 횟수가 적었고, 배점이 높은 트리플 루프와 더블 악셀-트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 점프를 시도하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프리스케이팅 구성 요소의 기본점에서 소트니코바가 더 앞섰다는 겁니다. USA 투데이와 영국 가디언 등도 비슷한 견해를 보였습니다. 김연아 스스로도 간절함이 떨어졌다고 했을 만큼 심판들에게 주는 울림도 적었을 것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그래도 행복해요' 김연아가 4일 팬 미팅 행사에서 사회를 맡은 방송인 전현무가 "우울할 때 소트니코바의 갈라쇼를 보라"고 하자 빵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모습.(사진=송은석 기자)
어쨌든 김연아는 소치에서 완벽한 연기를 펼쳤습니다. 4년 전 밴쿠버 대회의 영광을 깡그리 잊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고, 쉽지 않은 자신의 도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아직 4년 전 피겨 여왕의 화려한 즉위 장면이 아직 남아 있었나 봅니다. 김연아는 제로 베이스에서 다시 준비했지만 심판들은 이미 100점에서 판정을 시작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랬다면 4년 전 전성기 때에서 점수는 아무래도 조금은 깎일 수밖에 없습니다.

소치에서 펼친 김연아의 무결점 연기는 올림픽 재도전을 밝힌 2012년 여름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해왔던 훈련의 모든 것을 김연아는 보여줬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완벽해서, 그래서 또 너무 강렬했던 2010년 밴쿠버의 연기를 넘기에는 2% 부족했습니다.

아쉽게도 사람들의 기억은 2012년이 아니라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소치의 김연아는 4년 전 밴쿠버 때 자신의 모습을, 아니 사람들의 기억을 뛰어넘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p.s-제 마음 속의 아이돌은 가수 이문세입니다. 그렇다고 제 연령대를 4, 50대로 오해하지는 마시고, 아직은 30대입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누나와 형이 즐기던 음악을 따라듣다 완전 푹 빠지게 됐습니다. 그의 노래 중에 '기억이란 사랑보다'라는 곡이 있죠. 마지막 가사는 '기억이란 사랑보다 더 슬퍼'라는 문구입니다. 그때는 그 가사의 진의를 잘은 몰랐는데 이제야 사람의 기억이라는 게 이렇게도 슬픔을 유발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단지 개인 혼자의 내면에서뿐만이 아니라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게까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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