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그의 최근 앨범들 면면을 살펴보면 친근함과는 거리가 좀 있다. 차라리 도전적이었다. 그런데 그가 작정하고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음반을 만들었다. 정규 11집 앨범 ‘폴 투 플라이’(Fall To Fly-前)다. 음악적 욕심은 사운드의 완성도에 집중시켰다.
최근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승환은 큰 산 하나를 막 넘은 사람처럼 홀가분해보였다. “벼랑 끝에 섰었다”가 다시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는 의욕을 되찾은 개운함이다.
이승환이 웃으면서 무수하게 던진 자조 섞인 농담들에는 결코 쉽지 않았던 그의 지난 4년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그런데 마냥 재미있었다. ‘그래도 이승환인데’라는 막연한 믿음도 있었고 앨범을 들어본 뒤엔 ‘역시 이승환’이라는 만족감도 들어서다.
그리고 그의 농담 속엔 “어느 순간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10집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땐”
이승환은 지난 2010년 정규 10집 앨범 ‘드리마이저’(Dreamizer) 이후 4년여 만인 3월 26일 새 앨범을 발표했다. 이승환이 말하는 ‘벼랑 끝에 선’ 시기는 4년 전이다. 지금은 웃으면서 말하지만 당시만 해도 꽤 힘들었던 모양이다.
“10집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때 다시 앨범을 내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그때 앨범 내고 10일쯤 지나니까 이 앨범 끝났다는 느낌이었어요. 1년 넘게 준비한 앨범인데 안타까웠죠. 앨범을 내는 게 불행한 일이라고 느껴졌어요”
“그래도 다시 새 앨범을 작업한 건 사람들은 잊기 마련이잖아요. 이제 사랑하지 않을 테야 해놓고 다시 사랑에 빠지는 거랑 똑같아요. 2년 전부터 뭐든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샘솟았어요. 들려주고 싶은 욕심도 생겼고 제가 만든 것들에 대해 자신감도 생겼어요”
그래서 이번 앨범명이 ‘날기 위한 추락’이란 의미의 ‘폴 투 플라이’다.
“‘어린왕자’라는 수식어는 싫어요. 그 수식어가 음악적으로는 발목을 잡았던 것 같아요. 요즘은 팬들이 절보고 ‘공연의 신’에서 ‘공연의 쉰’이라고 바꿔줬어요. 대중의 사랑을 먹고 사는 가수가 자기 것만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교만했다고 반성하기도 했어요. 발라드도 결국 내 건데 그게 더 낫지 않았을까. 벼랑 끝에 서보니까 알겠더라고요”
“1997년 옛날부터 내리막길을 걸었다고 하는 내 상황과도 비슷하고 답답한 심경도 폴(fall. 추락)에 가깝다고 생각했어요. 비상(fly)을 준비한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도 담았고요. 타이틀곡이 밝은 곡인 건 사랑의 아픔에 대한 흔적들이 지워져서 기억도 안 나고 아픈 곡을 못 쓰겠더라고요. 요즘엔 밝은 곡 쓰는 게 더 편해요”
“지금까지 앨범 중 가장 완성도 높다”
이승환은 이번 앨범을 위해 미국 L.A 헨슨 스튜디오와 네쉬빌에 위치한 오션웨이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진행하고, 영국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마스터링 작업을 마쳤다. 전편에서만 수록곡 중 절반에 달하는 5곡이 각각 다른 장르와 성격의 뮤직비디오로 제작됐다.
“무조건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로 대중친화적인 음악을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죠. 대중적이긴 하나 완성도는 양보할 수 없었어요. 지금까지 중에 가장 완성도 높은 앨범이에요. 매 앨범 조금씩 후회를 하는데 이번엔 가장 좋은 사운드라고 자부해요”
“사실 추억을 공유하고 팬들과 ‘추억 팔이’를 하는 것도 괜찮은데 전 늘 새로운 걸 하고 싶었어요. 옛 노래만 알게 된다면 스스로 비참할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이 앨범이 잘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물량공세를 하고 있어요. 뮤직비디오도 5편이에요. 계속 히든을 보여주는 거죠. 안 될 것 같으면 또 보여주고. 이래도? 이런 식으로 해보려고요”
이승환의 정규 11집에는 배우 이보영을 비롯해 가수 이소은, MC메타(가리온), 유성은, 실력파 보컬그룹 러쉬 등이 피처링으로 참여했다.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팝재즈 싱어 바우터 하멜(Wouter hamel)과 도종환 시인의 참여가 눈에 띈다.
“도종환 시인께 작사를 부탁한 건 곡을 만들어놨는데 제가 쓸 만한 가사가 아니더라고요. 전 실연당해서 찌질해진 남자나 유머러스한 것에 특화됐잖아요.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 이 곡은 진중하고 깊이 있는 가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는 故노무현 전 대통령을 존경하는 마음을 담은 곡이다.
“환호는 아니라도 성원은 받았으면”
이승환의 정규 11집은 2CD의 더블 앨범으로, 하반기에 후편이 공개될 예정이다.
“전편과 후편으로 나눴는데 후편도 녹음이 거의 끝났어요. 전편은 인지도를 높여야 한다는 생각에 듣기 편한 음악들 위주로 채웠어요. 전편이 잘 되면 더 실험적인 음악들이 후편에 있어요. 전편 망하면 후편 안 낼 수도 있어요. 전편에 너무 돈을 많이 써서”
“예전엔 음악을 듣다가 제 노래가 나오면 시끄러워서 넘겨버렸다고 하더라고요. 이번엔 듣기 편하지만 완성도가 높은 음악이에요. 차트에 올라가고 싶은 앨범이랄까”
“후배들에게 환호까지는 아니라도 성원을 받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그런 거에 약간 ‘자뻑’하는 것 같아요. 사운드는 엠피쓰리로 들으셔도 다를 거예요. 뭔가 정갈하고 정돈돼있다는 느낌. 그런 느낌을 받는 친구들이 훗날 또 음악을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