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심을 민생개혁으로 꽃피운 정조에게 배워라"

[노컷인터뷰] 역사학자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가 말하는 인간 정조

영화 '역린'의 한 장면
"왜 똑같은 책으로 배우더라도 어떤 사람은 암기하는 것에 머무는데 누군가는 행동으로 옮기려고 애를 쓸까요?"
 
한영우(76)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1752-1800, 재위 1777-1800)의 사람됨을 묻자 대뜸 돌아온 반문이다. "결국 정조는 가슴으로 공부했기에 실천하려는 의지가 강할 수밖에 없던 인물"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지난 30일 개봉한 사극 '역린'과 앞서 17일 선보인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의 축제 3D'(이하 의궤 8일간의 축제)는 정조의 삶을 통해 지금 시대에 필요한 인물상을 찾으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닮은꼴 영화다.

상생을 가로막는 무한경쟁과 사람조차 도구로 여기는 물질만능을 부추기는 극단의 시대상이 실천가 정조를 되살려내고 있는 것이다.
 
■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 극단의 시대 절감하며 자란 아이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노컷뉴스 이명진 기자)
쉽게 풀어쓴 40여 권의 저서를 통해 역사학의 대중적 지평을 넓혀 온 한영우 교수. 서울 관악구 서울대 인근에 있는 개인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조선의 임금 가운데 정조처럼 어려운 처지에서 왕이 된 사람이 있나 싶다"고 말문을 열었다.
 
"열한 살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어가는 것을 목격한데다, 세손 시절부터 끊임없이 암살 위협에 시달렸으니 어린 가슴에 커다란 멍이 들었을 겁니다. 정조가 죽을 무렵 신하들에게 하소연을 합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느냐. 밥을 한 번도 맛있게 먹어본 적이 없다'고요. 그 과정에서 암살 위협과 불면증에 대한 언급도 이어지죠. 어찌 보면 사람으로서 정조를 생각하면 안쓰러움이 앞섭니다."
 
한 교수는 정조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살던 시대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조선 19대 왕인 숙종 때는 환국정치라 해서 당파별로 무더기로 내보내고 받아들이고를 여러 차례 반복했죠. 이때 정권을 잡은 당파는 상대편을 몰살했어요. 복수가 복수를 부르는 끊임없는 악순환이 계속된 거죠. 이 과정에서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는 '탕평'의 중요성이 부각됩니다. 숙종은 이를 실천하지 못하고 죽어요. 이어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왕이 되면서 숙종 때 핍박 받던 소론과 남인이 집권하는데, 이때 경종이 노론 사대신을 죽입니다. 숙종대에 권력을 휘두르던 노론에 대한 보복이 이뤄진 겁니다. 그런데 경종이 몇 년 만에 돌연 세상을 뜨고 노론이 밀던 영조가 왕이 됩니다. 노론에 포위된 영조는 초반에 소론을 내치기도 했지만, 30대에 접어들면서는 남인과 소론도 받아들여 탕평의 기틀을 닦죠."
 
그럼에도 노론의 권력은 막강했다. 개혁을 하려 해도 기득권 세력으로 결집한 노론의 벽에 막히기 일쑤였다.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도 이러한 정치적 맥락 안에서 벌어졌다고 한 교수는 전했다.
 
"사도세자는 소론의 실용적인 노선을 따르는 게 나라에 유리하다고 봤죠. 그러한 사도세자를 보면서 노론은 그가 임금이 되면 위험하다고 여겼던 겁니다. 노론은 끈임없이 사도세자를 정신병자로 몰아가면서 압박하고, 사도세자 역시 이에 격하게 행동하죠. 영조 역시 자기를 왕으로 만들어 준 노론을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세자와의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결국 사도세자는 뒤주에 갖혀 8일 만에 죽음을 맞죠."
 
숙종, 영조대의 숙원이던 탕평책을 본궤도에 올려놓은 이가 정조다. 노론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몬 벽파와 그를 옹호하던 시파로 나뉘는데, 정조는 시파와 손을 잡고 벽파 가운데서도 온건한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 당대 권력을 움켜쥔 노론을 모두 적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데 정조의 현명함이 있다고 한 교수는 말했다.
 
"개혁에 대한 사도세자의 뜻을 아들 정조가 확장한 셈이죠. 왕이 된 직후 싱크탱크 격인 규장각을 만들고, 장용영이라는 친위부대를 만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실제로 이들 조직은 정조가 백성을 위한 개혁 정책을 추진할 때 강력한 지원 세력으로 결집하게 됩니다."
 
■ '역린' '의궤 8일간의 축제'…영화가 되살려낸 실천가
 
영화 역린은 정조가 즉위 1년인 1777년 7월28일 자신을 암살하려 한 반대파를 그 이튿날 숙청한 정유역변을 모티프로 했다.

한 교수는 "정유역변은 쌓이고 쌓였던 반대파와의 갈등을 정조가 기습적으로 해결하려 한 사건으로 보인다"는 의견을 냈다.
 
한 교수에 따르면 정조를 괴롭히다 이때 숙청된 세력은 크게 세 축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사도세자의 여동생, 그러니까 정조의 고모인 화완옹주다. 오빠랑 사이가 안 좋았던 화완옹주는 영조에게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자질해 그가 죽는 데 일조했다고 기록돼 있다.

화완옹주의 양아들이 정후겸인데 그도 어머니를 따라 정조에게 적대적인 입장을 취한다. 정조는 임금이 된 뒤 화완옹주를 유배 보내 서인으로 만들고 정후겸은 죽인다.

두 번째가 작은 외할아버지 홍인한으로, 그는 사도세자를 죽이는데도 앞장섰던 인물이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는 별개로 외가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홍인한의 아들까지 합세해 정조를 없애려 했다. 그는 정후겸과 함께 사약을 받았다.

마지막이 항렬로는 정조의 할머니지만 어머니 혜경궁 홍씨보다 나이가 어린 정순왕후다.
 
"정순왕후도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간접적으로 도움을 줬다고 할 수 있죠. 정조 입장에서는 불효가 되니 법적으로 할머니인 정순왕후를 죽일 수는 없었죠. 조선 시대에는 불효자가 되면 백성에게 버림받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요. 결과론적이지만 정순왕후가 목숨을 보존함으로써 정조 사후 그가 그렸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전개되니 아이러니죠. 이렇듯 정조의 할머니 정순왕후, 고모인 화완옹주, 외가는 노론의 중심 인물들로 그 갈등이 사도세자에서 정조에게로 대물림된 겁니다. 이 세력들은 세손 시절부터 내시들을 앞세워 정조를 죽이려 했는데, 정조가 임금이 되면서 바로 손을 본 셈이죠."
 
영화 의궤 8일간의 축제는 정조가 즉위 19년(1795년)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위해 떠난 8일간의 화성행차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내용을 재현한 작품이다.
 
한 교수는 당시 정조의 화성행차를 두고 "어머니의 회갑잔치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조선의 미래를 위한 야심찬 행보였다"고 전했다.

수원 화성 축조는 정조가 추진하던 개혁의 종합판으로, 아들(순조)이 15세가 될 때 왕위를 넘기고 자신은 화성에서 살면서 부자간 협력정치를 꿈꿨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파죽지세로 서울까지 밀고 올라온 왜군을 겪은 조선에서는 왜란 뒤 수원에 요새를 지어야 한다는 의견이 끊이지 않았는데, 정조가 화성을 통해 이 구상을 실현했어요. 이로써 남쪽의 수원 화성은 북쪽의 북한산성, 동쪽의 남한산성, 서쪽의 강화도와 함께 서울을 애워싸게 됐죠. 난공불락의 성곽도시 화성을 세우면서 정조는 교통이 좋은 이곳을 국가 발전에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모범적인 상공업도시이자 농업도시로 만들고자 했죠. 당시 수원 동서남북에 팠던 저수지는 지금도 남아 있는데, 그때부터 수원은 흉년을 모르는 농업도시가 됐어요."
 
■ "사적 원한을 개혁의지로 승화시킨, 스스로 위대해진 사람"
 
영화 '의궤, 8일간의 축제 3D'의 한 장면
정조가 꿈꾼 나라는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한 교수는 "민본(民本)보다 업그레이드 된 민국(民國)이 정조의 정치적 이상향이었다"고 정리했다. 민본의 핵심이 '백성을 위한 정치'에 있다면, 민국의 그것은 '백성에 의한 정치'에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결국 정조는 백성의 정치 참여가 확대된 나라를 구상했던 셈이다.
 
"정조는 규장각에서 배출한 신하들을 곁에 두고 민생을 위한 개혁을 단행합니다. 영조 때 38%였던 평민의 과거 급제 비율이 정조대에 이르러 53%를 넘어섰고, 박제가 유득공 등 서얼 출신을 측근으로 등용해 전적으로 신뢰했어요. 화성 축조 기록을 담은 의궤만 봐도 당시 공사에 참여한 노동자 5000여 명의 이름과 업무, 품삯 등까지 세세하게 기록돼 있어요. 세계 어디에도 없는 토목실명제를 철저하게 이행한 것인데, 민국에 대한 실천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끊임없는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왕이 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고 민생 안정을 위한 개혁을 고민했던 정조다. 무엇이 그를 이끌었을까. 한 교수는 그 원동력으로 성인(聖人)이 되겠다는 정조의 정치적 의지를 지목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불명예를 씻고 자신도 훌륭한 성인이 되겠다는 의지가 대단했어요. 실제로도 성인으로서 검소한 삶을 살려고 무척이나 애썼죠. 그가 생활하던 창경궁에는 비가 샜고, 옷도 공식석상이 아니면 올이 굻은 무명이나 명주옷을 입었어요. 먹는 것도 된장, 간장을 포함해 반찬 일곱 가지 이상을 안 먹었죠. '책벌레'라는 별명이 말해 주듯 건강이 나빠질 정도로 책을 읽어 임금이 된 뒤에는 대학자로서 대신들을 리드했고, 아버지가 만든 무예 18기에 6기를 더해 완성할 만큼 무예도 출중했죠. 하나 하나 들여다 보면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을 정도예요."
 
왕이기에 앞서 한 사람으로서 값진 삶을 산 정조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전하는 유훈은 "백성의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한 교수는 전했다.
 
"그 시대에는 백성을 정치의 중심 세력으로 끌어올리는 데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도 정조는 백성들의 정치 참여 비중을 끌어올리는 데 매진했어요. 정조는 가슴에 커다란 멍을 안고 컸어요. 하지만 왕이 된 뒤 실행에 옮긴 개인적인 복수도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게 만든 정치 구도를 극복해야 한다는, 백성의 삶의 수준을 높일 수 있도록 정치를 정화시켜야 한다는 쪽으로 승화시켰죠. 여기에 스스로 위대해진 한 인간의 모습이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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