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구출하라"…세월호와 빅토리호의 명암

[임기상의 역사산책 28]지옥 같은 흥남부두에서 내린 지시 "다 태워라"

흥남철수작전 때 피난민 10만 명을 실어나르는 데 투입됐던 빅토리호 중 1대인 레인 빅토리호가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한 부두에 정박해 있는 모습이다. (사진=거제시 제공)
◈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 피난민 구조에 나서다

"우리 앞에 홀연히 배 하나가 나타났다.
그냥 배가 아니라 내게는 갑판의 끝이 하늘에 닿아 있는 듯 했던 너무도 커다란 배였다.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보았다.
그때 하늘로 솟은 그 배의 높은 난간에서 홀연히 풀어져 내려오던 사다리를…
사람들이 그 사다리를 타고 배에 오르기 시작했다.
아~아~ 성서에 나오는 야곱이 보았다는, 하늘로 오르는 통로.
천사들이 오르내리던 사다리가 그것보다 황홀했을까?"
(공지영 장편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에서)

북새통을 이룬 흥남부두에서 피난민들이 배에 오르고 있다.
1950년 12월 19일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흥남항으로 들어왔다.

건조한 지 5년이 된 7,800t급 미국 국적의 화물선이었다.

일본 요코하마에서 해병대 항공단에 공급할 제트연료 10만톤을 싣고 흥남에 내려놓을 계획이었다.

레너드 나루 선장은 쌍안경으로 부두를 살펴보다 깜짝 놀랐다.

마리너스 레너드 라루 선장. 한국전쟁이 끝난 후 성베테딕토회 수사가 되었다.
"처참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북한 피난민들이 부두에 떼를 지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레로 나르거나 들것, 혹은 끌고 다닐 수 있는 것은 모두 갖고 나왔습니다.
그들의 옆에는 놀란 병아리처럼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뒤에는 그들을 죽이려는 적군이 있었고, 앞에는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라루 선장은 지금은 제트연료를 하역할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선원 10명에게 지시를 내렸다.

"사람을 태우십시요.
타고자 하는 사람 모두를요.
전부 다 태우세요"


◈ 정원 12명의 화물선에 피난민 14,000명이 승선하다

라루 선장은 키를 잡고, 선원 10명은 사다리와 그물망을 배 측면으로 내렸다.

차고 강한 바람이 불더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로버트 러니 상급선원의 회고다.

"그들은 마치 지옥의 구덩이에서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를 발견한 사람들 같았다.
피난민들은 사다리를 타고 배로 기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보따리를 이고 아이를 업고 있었다.
갑판에 올라오면 차례 차례 지하 5층으로 내려갔다.
그러면 뚜껑을 닫았다.
이어 지하 4층으로, 이어 3층으로…
거기에는 화장실도 없고, 불빛도, 먹을 것도, 물도 없었다"

승선은 밤새도록 진행되어 다음 날 동이 트고 정오가 될 때까지 계속됐다.

군함은 계속 포를 쏘아대고 함재기는 연신 날라와 흥남 외곽 저지선 건너편을 폭격했다.

흥남부두 앞바다에서 출격하고 있는 콜세어기.
이렇게 해서 14,000명의 피난민이 배에 올랐다.

배는 남쪽으로 사흘간 항해했다.

피난민들은 어둠 속에서 물 한 잔 못 마시고 버텼다.

그 와중에 아기 5명이 차례차례 태어났다.

산모들을 위해 선원실 세 개를 비우고 잠자리를 마련했다.

거제도에 도착했을 때 피난민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고, 머릿수는 5명이 늘었다.

배가 도착하자 거제도 주민들이 일제히 몰려와 준비한 물과 주먹밥을 나눠 주었다.

2005년 5월 27일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족공원에 건립된 흥남철수 기념비 앞에 선 로버트 러니와 현봉학 박사. 러니는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상급선원이었고, 현 박사는 흥남서 피난민들을 구조한 일등공신이었다. (사진=거제시 제공)
피난민들이 어느 집에 들어가도 주민들은 친척이 온 것처럼 잠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했다.

전쟁이 끝나고 수도원 수사가 된 라루 선장은 이렇게 신앙고백을 했다.

"저는 때때로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 작은 배가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을 태우고 어떻게 한 사람도 잃지 않고 그 많은 위험을 극복했는지를…
그해 크리스마스에 한국의 검은 바다 위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제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메시지가 저에게 전해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흥남부두에서 대규모의 철수작전이 벌어진 건가?

◈ 청천강 전선에 이어 함경도에서도 유엔군 후퇴하다

개마고원에서 후퇴하다 함흥 입구에 있는 고토리에 머물고 있는 미 해병1사단과 피난민들. 미군이 이 곳에 들어서자 따라온 피난민이 3,500명에 달했다.
1950년 12월 초.

청천강 전선에서 중공군의 기습 공격을 받은 유엔군이 38선으로 후퇴했다.

이어 원산마저 점령당하자 함경도에 흩어져 있던 미 10군단과 국군 1군단은 고립됐다.

결국 도쿄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는 전면 철수를 지시했다.

이를 위해 흥남 앞바다에 항공모함 7척과 전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7척, 로켓함 3척이 배치됐다.

이들이 퍼부어대는 엄청난 화망이 쫓아오는 중공군의 접근을 막았다.


이때 발사한 포탄이 인천상륙작전 때보다 70% 더 많았다.

흥남철수 당시 접근하는 중공군에게 포격을 하는 전함 미주리호.
흥남에서 철수하는 유엔군 병력은 총 10만 5,000명에 달했고, 차량은 1만 8,422대, 각종 전투물자가 3만 5,000톤이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12월 12일 미 해병1사단을 시작으로 철수작전이 시작됐다.

작전에 가장 큰 어려움은 접근하는 중공군이 아니었다.

바로 피난민 문제였다.

평양철수 때도 그랬지만 여기서도 20만 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이 몰려와 배에 태워달라고 애원했다.

알몬드 10군단장은 처음에는 3천 명 정도 철수시킨다는 방침을 세웠지만, 큰 반발에 부딪혔다.

10군단의 민사부 고문으로 있던 현봉학 박사가 피난민을 구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미군 수뇌부를 설득했다.

이어 국군 수뇌부도 "우리도 배를 타지 않고 피난민을 엄호하면서 걸어서 후퇴하겠다"고 버텼다.

결국 알몬드 장군이 방침을 바꿨다.

"우리는 피난민들을 놔두고 갈 수 없다.
모두 구출하라"

피난민들의 전면 철수가 결정되자, 남한과 일본에서 수송선과 상륙정이 징발되어 흥남 앞바다로 모였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징발된 것이 아니고, 화물을 싣고 왔다가 자진해서 합류한 것이다.

군함에 차례 차례 타고 있는 피난민들. 부두에 몰린 사람들 중 절반만 탈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약 9만 8,000명의 북한 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 수도원 수사가 된 레너드 라루 선장

14,000명의 생명을 구한 라루 선장은 이 사건을 계기로 고통받고 있는 한국인을 위해 기도하겠다며 '마리너스'라는 이름으로 베네딕토회 수사가 되었다.

그는 평생을 미국 뉴저지의 뉴턴 수도원 성물가게에서 일하다 2001년 서거했다.

문을 닫게 된 라루 선장의 수도원을 살린 베네딕토회 왜관 수도원.
재미있는 건 그가 있었던 뉴턴 수도원이 수사 지원자가 끊어져 영락의 길을 걷자 한국의 왜관 수도원이 지원에 나선 것이다.

지금은 왜관수도원의 수사들이 이 곳에 파견되어 수도활동을 하고 있다.

젊은 선장은 한국인들을 구했고, 젊은 한국인들은 문을 닫을 뻔 했던 선장의 수도원을 살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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