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염 과장과 2014년 염 감독의 '비와 눈물'

[임종률의 스포츠레터]

'내년 KS는 비가 내릴까' 염경엽 넥센 감독은 현대 프런트 시절인 2004년 이후 10년 만에 사령탑으로 다시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았다. 당시는 빗속에 우승을 차지했지만 올해는 준우승에 머무른 뒤 비가 내렸다.(자료사진=넥센 히어로즈)
'2014 한국야쿠르트 세븐 프로야구' 한국시리즈(KS)가 삼성의 통합 4연패로 막을 내렸습니다. 11일 6차전에서 넥센을 11-1로 누르고 4년 연속 우승컵을 가져갔습니다. 투타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2010년대 최강팀을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창단 첫 우승에 도전했던 넥센은 3차전과 5차전 대역전패의 후유증을 견디지 못하고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막강한 타선을 갖췄지만 야구는 투수놀음이라는 속설답게 3명 선발에 3명의 필승 불펜으로 맞서야 했던 마운드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삼성의 흥겨운 우승 세리머니와 패장과 승장, MVP 인터뷰까지 모든 일정이 끝나고 관계자와 취재진도 일을 마무리할 즈음. 텅빈 잠실구장에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제법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실외 기자석에 자리를 잡은 취재진은 서둘러 노트북 등 장비를 갈무리했습니다.

관계자들은 "그나마 경기가 끝난 뒤에 비가 내려 다행"이라며 홀가분하게 얘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만약 내일까지 경기를 했으면 어쩔 뻔했느냐"는 말도 나왔습니다. 비 온 뒤 급강하할 기온에 선수와 팬들, 관계자들 모두 추위에 떨어야 했을 것이라는 우려였습니다.

이런저런 말들 속에 저도 짐을 싸다가 문득 염경엽 넥센 감독(46)이 떠올랐습니다. 공교롭게도 10년 전 염 감독의 KS 마지막 경기도 굵은 비로 마무리됐다는 사실이 상기됐기 때문입니다. 마침 염 감독이 인터뷰 도중 흘린 눈물도 오버랩되면서 내리는 비를 그저 무심상하게 지나치기 어려웠습니다.

▲"10년 전 KS '내가 뭐하나' 자괴감"

'나의 10년 전은요...' 지난 4일 삼성과 한국시리즈 1차전을 앞두고 염경엽 넥센 감독이 취재진에게 2004년 현대 프런트 시절 한국시리즈 추억을 들려주는 모습.(자료사진=넥센 히어로즈)
염 감독은 올해 포스트시즌 기간 자신의 10년 전 KS의 추억을 떠올렸습니다. 특히 지난 4일 대구에서 열린 KS 1차전을 앞두고는 10년 만에 맞는 KS의 특별한 감회에 젖어 취재진에게 적잖은 시간 동안 당시의 쓰라렸던 마음을 전했습니다.

2004년 11월 1일 밤. 당시 현대 프런트 운영팀 과장이던 염 감독은 빗속에 잠실벌을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습니다. KS에서 삼성을 9차전 끝에 꺾고 정상에 오른 선수단의 축승연을 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경기는 역대 최악의 우중혈투로 기록될 만큼 많은 비가 내렸죠. 게다가 시간 제한 규정으로 무승부도 3번이나 나오는 등 두 팀이 9차전까지 치를 정도로 접전을 치러 선수단의 기쁨은 더했습니다.


하지만 염 감독은 달랐습니다. 환희의 순간을 누릴 새도 없이 최대한 빨리 선수단의 축하 파티를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염 감독은 "잠실구장 근처 호텔을 잡았는데 정말 택시가 하나도 잡히지 않았다"면서 "그래서 양복을 입은 채로 뛰어서 호텔로 갔다"고 회상했습니다.

가까스로 호텔에 도달한 염 감독은 우승 플래카드를 걸고, 우승 동영상을 만들고 부산스럽게 움직였습니다. 그렇게 선수단이 즐길 멍석을 깔아준 뒤 한숨을 돌리려고 밖으로 나온 염 감독. "그때 '내가 여기서 지금 뭐하고 있나' 자괴감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염 감독은 "내가 있을 곳은 그라운드인데 하는 생각에 슬펐다"고 당시를 돌아봤습니다. 아무리 미래를 위한 투자로 프런트 업무를 배우고는 있지만 선수 출신으로 자신의 뿌리를 찾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는 겁니다. 후줄근하게 젖은 몸보다 더 무거운 마음이었습니다.

당시 김재박 감독 이하 선수단은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지만 염 감독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당시 내린 비는 염 감독에게는 아픔의 비였을 겁니다.

▲"욕 먹어서라도 꼭 이기고 싶었다"

'잘 했다' 염경엽 감독(왼쪽)이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선취점을 올린 서건창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모습.(자료사진=박종민 기자)
10년 만에 맞이한 KS는 달랐습니다. 당시는 프런트였지만 지금은 당당히 한 팀의 사령탑이었습니다. 염 감독은 "나는 수석코치를 하면 정말 잘할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감독이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꿈의 자리에서 맞았던 꿈의 무대. 어떻게 해서든 꼭 이기고 싶었습니다. 염 감독은 1승2패로 밀렸던 지난 8일 KS 4차전을 앞두고 "나도 욕 먹지 않고 엔트리를 짤 수도 있었다"고 속내를 밝혔습니다.

투수 10명. 보통 11~12명으로 꾸리는 출전 선수 명단에 투수가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에이스 앤디 밴 헤켄과 헨리 소사가 3일 만에 등판하는 일정, 여기에 필승 불펜 손승락과 조상우, 한현희에게 과부하가 걸린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왼손 불펜도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염 감독은 "나도 좌완을 넣고, 선발 4명으로 갈 수도 있었다"면서 "그런 뒤 지금 선수 구성 상 어쩔 수 없다고 하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하지만 그렇게 하고 지면 뭐하겠는가"라고 반문했습니다. 상대보다 뒤지는 전력인 만큼 이기는 야구를 위해 욕 먹어도 독한 야구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만큼 절실했습니다.

하지만 염 감독과 넥센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3차전과 5차전 역전패가 뼈아팠습니다. 모두 1-0으로 앞서다 경기 막판 수비 불안과 실책으로 경기를 내줘야 했습니다. 특히 3차전 패배 뒤 염 감독은 "열불이 나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할 정도로 아쉬움이 컸습니다.

결국 지난해까지 3년 연속 통합 우승을 이룬 삼성의 벽은 높았던 셈입니다. 모든 것을 쏟아부었지만 2%가 모자랐던 것입니다.

▲10년 만에 다시 운 하늘 '빗물인가, 눈물인가'

'아쉽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염경엽 감독이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끝내기 역전패를 안은 뒤 인터뷰를 하는 모습.(자료사진=넥센)
6차전 뒤 인터뷰실로 향하던 염 감독과 마주쳤습니다. 고개 숙여 인사하는 그의 눈가와 얼굴은 이미 벌개져 있었습니다. 경기 직후 구단 홍보팀 직원들은 한동안 자취를 감춘 염 감독을 이리저리 찾으러 다녔다고 하더군요.

자리에 앉은 염 감독은 첫 한 마디 이상을 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정말 (우승을) 하고 싶었습니다"며 입을 연 염 감독은 말문이 막혔습니다. 참으려 했지만 고인 눈물이 흐르자 염 감독은 "잠시만 기다려달라"며 회견장을 빠져나갔습니다. 물을 마시고 호흡을 고른 뒤에야 인터뷰실로 들어왔습니다.

겨우 시작된 인터뷰에서 염 감독은 "굉장히 아쉽고, 잊지 못할 시리즈가 될 것 같다"면서 "정말 (우승이) 하고 싶었는데 정말 아쉽다"고 말했습니다. '정말'과 '아쉽다'가 반복됐습니다. 이어 "팬들도 창단 첫 우승을 바랐을 텐데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쉬움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염 감독은 "긴 레이스 동안 여러 어려움이 있었는데 정말 선수들이 잘 견뎌줬고, 잘 해줘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정말 고맙다"면서 "비록 시리즈는 패했지만, 아픈 만큼 얻는 게 있을 거라 생각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내일을 바라봤습니다. 염 감독은 "끝났으니까 더 단단해지는 넥센이 될 수 있도록 더 준비를 잘 해서 올해 못했던 우승에 다시 도전하겠다"면서 "팬들과 선수들, 그리고 나의 바람이 바람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하고 나서야 비로소 눈물을 훔쳤습니다.

'고개 들어라, 내일이 있다' 염경엽 감독은 한국시리즈 6차전 패배 뒤 잘 싸워진 선수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내년 시즌을 다짐했다. 오른쪽은 박병호, 강정호 등 선수들이 6차전 패배 뒤 더그아웃으로 들어오는 모습.(자료사진=넥센, 황진환 기자)
염 감독의 '눈물의 인터뷰'가 마무리된 이후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공교롭게도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10년 전 KS 마지막 경기 때처럼 염 감독에게 내린 비는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요? 이날의 비는 예전 '염 과장'이 맞았던 아픔의 비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p.s-기사 작성과 송고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던 차창을 두드리는 비를 보고 들으며 이런저런 상념에 젖다 문득 전화기를 들었습니다. 넥센 구단 직원은 "오늘 선수단은 별도의 회식 없이 숙소로 돌아왔다"면서 "감독, 코치진, 선수들 모두 짐 정리 등을 위해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염 감독에게도 생각이 미쳐 전화를 걸어봤습니다. 자정이 넘은 시각에 통화는 연결되지 않았고, 통화연결음으로 '돌멩이'라는 곡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습니다. "굴러 난 굴러간다 내 몸이 부서져 한줌의 흙이 되도 굴러 난 굴러간다 내 사랑 찾아서 내 꿈을 찾아서"라는 가사가 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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