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브라질월드컵이 끝나자 일본축구협회는 멕시코 출신의 하비에르 아기레 감독을 선임했다. 월드컵을 끝으로 4년의 임기를 마친 알베르토 자케로니(이탈리아) 감독의 뒤를 이어 '사무라이 재팬'을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
앞서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오사수나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레알 사라고사, 에스파뇰은 물론, 멕시코 대표팀을 이끌고 국제무대에서도 인상적인 지도력을 선보였던 만큼 아기레 감독이 일본 축구의 밝은 미래를 이끌 적임자라는 평가까지 받았다.
‘숙명의 라이벌’ 일본이 월드컵 후 곧바로 아기레 감독을 선임하는 매끄러운 과정을 거친 것과 달리 한국은 최우선 협상 대상이었던 베르트 판 마르베이크(네덜란드) 감독과 계약이 결렬된 이후 두 번째 협상을 통해 독일 출신의 울리 슈틸리케 감독을 영입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며 상당한 비교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불과 6개월 만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일본은 아기레 감독이 불명예스럽게 지휘봉을 내려놓을 상황까지 내몰렸다. 스포츠계에서 금기시되는 승부조작을 시도했다는 혐의다.
아기레 감독은 과거 사라고사의 지휘봉을 잡고 있던 2010~2011시즌 상대 팀 선수들에게 패배를 요청하며 거액을 건넨 혐의를 받고 있다. 본인은 결백을 주장했고, 일본축구협회도 아기레 감독을 신임했다. 하지만 스페인 현지에서 아기레 감독의 재판이 진행될 것이라는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일본축구협회는 아시안컵 개막을 앞두고 아기레 감독이 재판까지 받게 될 경우 경질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밝힌 데 이어 대회가 한창인 15일에는 다이니 구니야 일본축구협회 회장이 직접 아시안컵이 끝난 뒤 아기레 감독의 거취에 관해 이야기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일본의 ‘스포츠닛폰’은 아기레 감독이 결과와 관계없이 아시안컵이 끝난 뒤 경질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지난 12일 팔레스타인을 4-0으로 꺾고 아시안컵을 기분 좋게 시작한 일본은 16일에는 브리즈번의 선코프 스타디움에서 열린 이라크와 조별예선 2차전에서 한 수 위의 경기력을 선보인 끝에 1-0으로 승리했다. 비록 1골 차 아슬아슬한 승부였지만 경기 내용 면에서는 일본이 이라크를 압도했다.
아기레 감독은 기분 좋은 승리에도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일본 취재진 역시 아기레 감독의 거취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저 기자회견이 끝난 뒤 아기레 감독을 향해 박수를 보냈고, 아기레 감독은 옅은 미소를 보였다.
과거 한일전에서 패한 감독에게 언제 지휘봉을 내려놓을 것이냐며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등 직설적인 질문을 자주했던 일본 취재진이 왜 하나같이 침묵했을까.
현장을 찾은 일본 취재진에 따르면 경기를 하루 앞두고 일본 취재진이 아기레 감독에게 승부조작에 대해 질문을 했다. 다이니 회장의 발언 직후의 일이었다. 하지만 아기레 감독 본인은 아시안컵 기간에는 승부조작에 대한 질문에 답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뿐만 아니라 아시안컵과 축구에 대한 질문만 해줄 것을 공식 요청했고, 일본 취재진은 이를 받아들였다.
아기레 감독은 자신을 둘러싼 최악의 상황에서 침착하게 현재 자신에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지난 대회 우승팀의 자격으로 출전해 가뿐하게 2연승하며 8강 진출을 눈앞에 뒀지만 들뜬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