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리그도 어느덕 막바지로 치닫고 있습니다. 특히나 여자부는 어느 시즌보다 치열한 순위 다툼이 펼쳐졌는데요. 사실 순위 다툼을 하고, 포스트시즌 준비도 병행하다보면 버려야 할 경기가 생길 때도 있습니다. 어차피 포스트시즌 진출이 어려워지면 미래를 위해 시즌을 아예 포기하는 팀도 나옵니다. 그렇다고 그냥 지는 것은 스포츠의 정신에 어긋나는 행동이겠죠. 팀 사정은 있겠지만, 팬들의 화살이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25년 전 오늘, 1990년 3월1일. 바로 '져주기 사건'으로 여자배구가 시끄러웠던 하루였습니다.
대통령배 2차대회 3~4위전과 결승전이 차례로 열렸습니다. 3~4위전에는 호남정유와 대농이 맞붙었고, 결승에는 현대와 선경이 올라간 상태였는데요. 2차대회 성적은 크게 의미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중요했던 것은 최종결승전 진출 여부였습니다.
1~2차대회 종합승점에 따라 최종결승전 진출 팀이 결정됐는데요. 3~4위전에서 호남정유가 이기면 대농의 종합승점이 170점, 결승전에서 선경이 현대를 꺾으면 선경의 종합승점이 180점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대농은 이기면 최종결승전 진출, 선경은 이겨도 대농이 져야 최종결승전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먼저 3~4위전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호남정유 라인업이 조금 이상했습니다. 호남정유는 장윤희를 비롯해 이도희, 김호정, 이정선, 홍지연 등 주전 선수들이 아닌 대통령배에서 한 번도 뛰지 못한 신인 선수들을 코트에 세웠습니다.
당시 대농은 여자배구의 강호였습니다. 1981년까지 184연승이라는 불명의 기록을 남겼고, 1회 대통령배 우승팀이기도 합니다. 6회 대회까지 우승 2회, 준우승 3회를 차지했습니다. 특히 2월28일 선경에게 지기 전까지는 17연승 행진을 달리고 있었는데요. 현 흥국생명 감독인 박미희와 주선진, 문효숙 등이 주전으로 뛰었습니다. 특히 박미희는 주포지션 센터 외에 보조 세터로 뛰는 등 전 포지션을 소화했습니다. '천재'라는 애칭이 따라다닐 정도였습니다.
덕분에 선경은 결승에서 이겨도 최종결승전에 진출할 수 없게 됐습니다. 결국 선경은 무기력한 플레이로 결승에서 0-3(3-15 7-15 11-15)으로 완패했습니다. 이겨도 최종결승전에 오를 수 없으니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겠죠.
그렇다면 왜 호남정유는 주전들을 뺐을까요. 당시 김철용 감독은 신인들에게 실전 기회를 주고, 최종 3~4위전을 대비하기 위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어차피 최종결승 진출이 불가능한 상황이었기에 이해는 됩니다. 좋은 신인을 뽑기 위해 일부러 지는 팀들이 최근까지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최고의 경기를 원하는 팬들에게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려던 선경에게나 아쉬움이 남는 경기로 남았습니다. 무엇보다 찜찜하게 올라간 대농도 최종결승전에서 현대에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고, 호남정유도 최종 3~4위전에서 선경에 졌습니다.
이렇게 최종결승전 진출팀을 바꿔버린 호남정유는 이듬해 8회 대회에서 처음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동안 현대와 대농이 양분하던 여자배구의 새 챔피언이었습니다.
이후 호남정유는 말 그대로 독보적이었고, 적수도 없었습니다. 8회부터 11회까지 대통령배를 4연패했고, 슈퍼리그로 명칭이 바뀐 뒤에도 5년 연속 정상에 섰습니다. 중간에 LG정유로 이름을 바꿨지만, 통산 9연패에 성공했습니다. 92연승을 달리기도 했었죠. 2000년 슈퍼리그에서 현대건설이 막아설 때까지 여자배구는 호남정유(LG정유)의 세상이었습니다. 2005년 3월 GS칼텍스로 바뀌었고,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