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끝작렬] '배지'는 검증보다 진하다

청문회 앞두고 의원실 찾아다니는 현역 장관 후보자들

노컷뉴스의 '뒤끝작렬'은 CBS 기자들의 취재 뒷 얘기를 가감없이 풀어내는 공간입니다. 전방위적 사회감시와 성역없는 취재보도라는 '노컷뉴스'의 이름에 걸맞은 기사입니다. 때로는 방송에서는 다 담아내지 못한 따스한 감동이 '작렬'하는 기사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편집자 주]

국회의사당 (자료사진)
국회 청문회를 거친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나랏일을 맡긴다는 의미이다. 과연 그 자리에 있을 자격과 자질을 갖춘 인물인지 청문회를 통해 걸러내는 것이 바로 국회의 핵심 기능이다.

때문에 기자들은 정부나 사법부의 주요 개각이 있을 때면 국회에 인사청문요청안이 도착하기도 전에 해당 상임위원이나 특별위원들의 방방을 찾아다니며 문제점을 캐낸다. 속칭 언론계에서는 '마와리(廻り)'를 돈다는 표현을 쓴다. 청문회 시즌에는 국회 의원회관을 돌아다니는 기자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런데 '마와리'를 도는 사람은 기자만이 아니었다. 박근혜 정부의 새해 첫 개각 이후 CBS 검증팀이 구성돼 오랜만에 찾은 국회에서 기자는 엉뚱한 사람과 마와리 경쟁을 해야했다. 바로 현역의원으로 국토부장관과 해양수산부장관에 내정된 유일호, 유기준 의원이다.

이들이 직접 해당 상임위 의원실을 찾아다니며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다닌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검증 대상인 장관 후보자들이 부지런히 마와리를 돌며 자신의 청문회 통과를 위해 애쓰고 있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송곳 검증을 위해 열심히 청문보고서를 분석하던 야당의 한 보좌관은 후보자가 난데없이 의원실을 방문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고 털어놨다. 재산 관계에서 석연치 않은 부분에 자료 요구를 하자 후보자가 방에 찾아와 이런저런 해명을 하더니 평소 친분이 있던 의원과 덕담까지 주고 받고 갔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 보좌관에게는 '살살하라'는 지령이 내려졌을 터. 의혹이 해소됐느냐고 물어보니 "찝찝하긴 한데 더는 캐기 힘들게 됐다"는 씁쓸한 답변이 돌아왔다.

보좌진들과 협업해 기사를 쓸 때 정작 '우리 의원 이름은 빼달라'는 이상한 부탁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차피 통과될 건데 나중에 관계도 생각해야 한다"며 노골적으로 보좌진들에게 수위 조절을 요구하는 야당 의원들도 있다고 한다. 청문회 준비에 매진해야 할 야당 보좌진들조차 의원 눈치를 봐야하는 황당한 상황인 것이다.

여의도에는 이른바 '배지 프리미엄'이라는 말이 있다. 국회의원의 속칭인 '배지'가 그 자체로 프리미엄을 갖는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인사청문회이다. 같은 동료 의원들이 장관이나 주요 보직에 임명됐을 때 봐주기 청문회를 하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배지들의 연대감이 얼마나 끈끈한 것인지 몰라도 야당 의원들도 '현역'이라면 일단 검증의 고삐를 풀어버리는 경향이 뚜렷하다. 국회에 15년 넘게 근무했던 베테랑 야당 보좌관은 "현역 의원이 장관 청문회에서 낙마한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배지 프리미엄을 안고 검증을 시작한 이완구 총리가 숱한 의혹과 국민적 반감에도 결국엔 임명되자 이같은 '현역의 법칙'은 더 굳어지는 듯 하다. 이완구 총리가 역설적이게도 청문 통과의 새 기준을 제시해버린 것이다. 저격수로 유명한 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이완구 프리패스'로 이제 웬만한 것은 넘어가는 상황이 됐다"고 한탄했다.

위기에 몰렸던 박근혜 정부가 또다시 현역 의원들 중에서 두명의 장관을 발탁한 것은 그래서 영리한 선택이었다. 적어도 국회라는 공간 안에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가 아니라 '배지는 검증보다 진하다'는 말이 더 통할지도 모르겠다. 장관도 되고, 내년 총선에도 출마해 또 배지를 달려는 두 후보자들이 10개월짜리 장관을 하면서 국민을 위해 어떤 정책을 펼 수 있을지, 그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기는 한 건지 관심을 가지는 동료들이 드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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