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로몬] 리퍼트 대사가 박근혜 대통령을 조롱했다고?

쓸로몬은 쓸모있는 것만을 '즐겨찾기'하는 사람들을 칭하는 '신조어'입니다. 풍부한 맥락과 깊이있는 뉴스를 공유할게요. '쓸모 없는 뉴스'는 가라! [편집자 주]

청와대 제공
미국 대사가 박근혜 대통령을 조롱했다? 군사안보 전문가인 김종대 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은 9일 페이스북을 통해 '눈이 번쩍 뜨이는 기사'를 봤다며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가 말한 기사는 바로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가 병원에서 '두 개의 한국(The Two Koreas)'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고 대사관 측이 밝혔다는 내용인데요, 많은 언론이 '김치 먹고 힘을 냈다'는 소식과 함께 전한 동정입니다.

포병장교로 한국전쟁에 참전하기도 한 워싱턴포스트 기자 출신의 돈 오버도퍼 교수가 1997년에 낸 이 책은 광복 이후 한반도 근대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전문 학술서는 아니지만 예리한 분석이 담겨 있어 한반도 현대사 및 한미 관계에 관한 '바이블'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입니다.

김 편집장은 '두 개의 한국'에 대해 "박정희가 어떤 독재자인지에 대해 고발하는 내용이 숱하게 나온다"며 "이걸 어제 대사관 측이 공개하고 오늘(9일) 박근혜 대통령이 세브란스병원을 방문한 건 한마디로 엿 먹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 대사가 박근혜 대통령을 어떻게 조롱했는지 직접 체험하시기 바란다"며 책을 읽어 보라고 권했는데요. 네, 그렇습니다. 928쪽이나 되는 '두 개의 한국'을 직접 구입해 읽어봤습니다.

◇ 18년 군림한 독재자 VS 경제성장 이룬 위대한 지도자

'두 개의 한국' 표지
책은 '시작과 종말'이라는 부제가 붙은 2장부터 '대통령 암살과 그 이후'라는 5장까지 약 130쪽 분량을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할애했습니다.

특히 '박정희(朴正熙)'라는 소제가 붙은 69쪽에서 77쪽까지 9쪽 가량에서 출생과 사범학교 졸업, 일본군 소위 재직, 여순사건 연루, 쿠데타, 10월 유신, 경제 개발, 암살에 이르기까지 일생을 압축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김일성이 항일 유격대였던 반면에 박정희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강제적이기는 했지만 잠시나마 다카기 마사오라는 일본 이름도 갖고 있었다."(69쪽)


"박정희는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해 1979년 암살될 때까지 18년 동안 남한의 현대사에 그 누구보다도 깊은 족적을 남겼다. 장기집권과 영향력 측면에서 그와 비견될 수 있는 인물은 오직 북쪽에서 반세기가 넘도록 권력을 휘둘렀던 김일성뿐이었다"(69~70쪽)

책 제목대로 두 개의 한국을 서술하다 보니 이렇게 박 전 대통령과 김일성 전 주석을 입체적으로 비교한 대목들이 많습니다. "대외적인 처세와 추구하는 이념은 달랐지만 한 가지 공통된 것은 모두가 독재자로 군림했다는 사실"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정권 연장을 위해 여러 차례 헌법을 개정한 데 대해서는 "일제강점기에 받은 일본식 교육이나 유교문화에 대한 애착, 군인이었다는 배경 등에 비추어 볼 때 박정희가 거추장스럽고 비생산적인 관행으로만 비추어지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신봉할 이유는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71쪽)는 설명이 붙었습니다.

반면 "박정희 시대에 얻어낸 남한의 경제 기적은 그야말로 쓰레기더미 위에 피어난 장미로 표현된다"(73쪽)는 구절처럼 경제 성장의 공(功)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있습니다.

당시 경제개발 계획의 성과를 일일이 수치로 제시하며 "이처럼 놀라운 업적을 감안할 때 대부분의 남한사람들이 박정희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79쪽)라고 말하는 대목도 있네요.

자,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책은 박 전 대통령의 생애를 기술하며 정치적으로 독재자로 군림했지만 경제 성장을 이룬 위대한 지도자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공과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로 읽힙니다.

◇ "리퍼트 대사가 박근혜 조롱?…상상의 나래" 반론도

김종대 편집장 페이스북
그렇다면 이제 김 편집장이 리퍼트 대사가 박근혜 대통령을 조롱했다는 대목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책은 1979년 한국을 찾은 카터 대통령과 박 전 대통령의 회담을 자세히 전하며 '당시 한-미 양국 정상 사이의 대면은 동맹국 정상간의 회담이라고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176쪽)는 국무부 차관보의 평을 인용했습니다.

당시 두 정상은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두고 의견이 엇갈린 상태였습니다. '그의 이력이나 그가 휘두르는 철권통치 등을 경멸하고 있었'(172쪽)던 카터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과 철수 계획을 논의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철수 계획을 조목조목 반박했고, 이에 카터 대통령은 남한의 인권 문제를 제기한 뒤 경제적으로 북한보다 훨씬 부강한 대한민국이 군사적으로 북한을 따라잡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고 책은 전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과 관련해 김 편집장은 미국대사관 측이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기 전 리퍼트 대사가 책을 읽고 있다고 밝힌 것은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과거에 인권을 유린한 박정희 대통령을 엿먹인 걸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비전문가인 기자가 김 편집장의 주장을 이러쿵저러쿵 평가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이에 대한 다른 전문가의 지적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합니다. 역시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입니다.

최형익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는 "평소 김 편집장을 좋아하는데 이번 글은 좀 이상하다. 그깟 책 한권 가지고 별 내용도 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특정 부분만 발췌해서 침소봉대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 'Strongman'은 강력한 지도자? 권력자? 독재자?

지난 2012년 대선 직전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아시아판에 '독재자의 딸(The Strongman's Daughter)'이라는 제목의 표지기사를 내보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역정과 정치 비전 등을 소개한 기사였는데 다소 엉뚱한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제목의 'strongman'을 어떻게 해석할지가 문제였습니다. 새누리당은 '강력한 지도자의 딸'로 번역한 보도자료를 배포했지만 대부분 언론은 권력자 혹은 독재자로 해석했습니다. 논란이 일자 타임은 인터넷판 기사 제목을 'The Dictator's Daughter', 즉 좀 더 명확한 의미의 '독재자의 딸'로 수정했습니다.

굳이 2년도 더 지난 논란을 꺼내든 건 'strongman'을 어떻게 번역하든 박 대통령이 독재자인 박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사실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는 점을 말씀드리기 위해섭니다.

박 전 대통령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세 차례 개헌을 통해 5대부터 9대까지 무려 18년을 대통령으로 지냈습니다.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정권은 더 길어졌을 겁니다.

한국의 현대사를 다룬 책이, 그것도 한미관계를 중심으로 한반도를 기술한 미국 학자의 책이라면 박 전 대통령을 '독재자'로 평가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경제 성장의 공처럼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특정한 장면이나 대목을 끌어다 동맹국의 대사가 대통령을 '조롱'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과연 온당할까요. 물론 전문 외교관 출신의 대사가 굳이 이 책을 다시 읽고 있다고 공개한 것이 어떤 의도인지 궁금하긴 합니다.

3만4000원의 거금을 주고 책을 사서 봤지만 처음 생각과 달리 해답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기자가 드릴 수 있는 답 역시 직접 책을 읽어보시라는 말뿐입니다. 김 편집장을 비판한 최 교수도 예리한 분석과 식견이 담긴 아주 좋은 책이라며 "리퍼트가 책 볼 줄은 아는 것 같다"고 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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