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참사가 일어났을 당시 저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몹시 분하고 화가 났어요. '어찌 이렇게 억울한 희생이 있을 수 있느냐'는 마음이었으니까요."
한편으로 그는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가슴에 새기고 한국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정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가졌었단다.
"그래요. 희망이 있었어요. 그런데 정화는 커녕 아직도 무엇 하나 시원하게 해결된 것이 없다는 얘기만 들려 오네요. 실망에 실망을 거듭하다보니 관심이 줄어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한국 사회에 대한 체념이 생겼다고 해야 할까요."
그는 "수많은 목숨의 희생으로 얻은 기회조차 헛것으로 흘려보냈다"며 참사 이후 1년의 시간에 대해 짙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노감독의 이러한 견해는 "급속한 산업화 탓에 물질 만능화된 한국 사회가 많은 것을 잃어 버리고 있다"는 통찰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언젠가 신문을 보는데 시래기를 다룬 시 하나가 눈에 들어왔어요. 어느 직장인이 식당에 걸린 시래기를 뽑아서 냄새를 맡으며 옛일을 떠올린다는 내용인데, 그게 못마땅했던 식당 주인과 싸움이 벌어지고 결국 경찰서까지 가게 됩니다. 그 직장인이 말해요. '나는 그리움을 훔쳤지, 시래기를 도둑질한 게 아니'라고요.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는 탓에 옛날이라면 웃어넘겼을 일도 큰 싸움으로 번진다는 생각을 했죠."
◇ "영화는 사람과 삶 담아내는 그릇…진심 담아야 오래 남아"
"천만영화가 한국 영화계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큰 돈을 벌게 되니 오직 이를 목표로 잡는 영화들이 양산되는 거죠. 진심 없는 영화는 오래 못 가는 법입니다. 재능 있는 젊은 영화인들도 많으니까, 오래 남는 영화를 만드는 쪽으로 관심을 기울였으면 좋겠어요."
임 감독에게 영화는 '사람과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란다. 사람마다 삶의 모습도 각양각색인 만큼 그릇의 모양과 크기는 다양할 수밖에 없다.
"제 가장 큰 영화적 관심사는 사는 얘기입니다. 여기에는 과장도 생략도 필요 없어요. 그러면 거짓이 되니까요. 감독이 보이는 만큼 찍고, 관객도 보이는 만큼 보는 것이 영화 아닐까요."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다사다난한 삶을 스크린에 담아내려는 그의 작업을 불편해 하는 권력과 부딪힐 때도 있었다. 해방 직후 한반도를 휩쓴 이념 대립의 소용돌이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가 조정래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둔 '태백산맥'(1994)을 만드는 과정에서였다.
"노태우 대통령 시절이었죠. '장군의 아들' 시리즈를 만들 때 태백산맥의 판권을 사 뒀어요. 시리즈를 끝내고 태백산맥을 찍으려는데, 정부 인사가 '이념 문제를 객관적으로 다룰 수 있는 시대가 아니지 않냐. 촬영을 강행할 경우 공권력을 동원해서 막겠다'고 하더군요. '1년만 지나면 정권이 바뀌니 기다리자'는 마음으로 쉬면서 찍은 영화가 바로 '서편제'(1993)였죠."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 태백산맥 촬영을 시작했지만, 상황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촬영이 진행되는 곳마다 안기부 사람들이 와서 흔적을 남기고 간 까닭이다.
"책으로 열 권 분량인 방대한 이야기를 압축해야 하는 일도 힘든데, 정부가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며 촬영장을 따라다니니 작품에 집중하지 못할 정도로 피곤했어요. 일 돌아가는 걸 보면서 만들고자 했던 의지도 다소 꺾였던 기억이 납니다."
◇ 사실주의 발판으로 도약…"나이 팔십, 치장 없애고 보이는 만큼 담게 돼"
그 연장선상에서 지난 9일 개봉한 102번째 연출작 '화장'(제작 명필름)은 임 감독의 도약을 엿볼 수 있는 지점이라는 데 남다른 의미를 품고 있다.
"뒤돌아보니 삶 자체만 다룬 영화가 없더군요. 지금까지 영화를 만들어 온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감독으로서 생명력을 잃을 것만 같았어요. 제 모습에 넌더리가 날 정도였죠. 빠져나가야 하는데 방법을 찾지 못하던 차에, 명필름으로부터 작가 김훈의 단편소설 '화장'을 영화화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어요. 모든 것에서 벗어나 완전히 다른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라 여겨 참여를 결정했죠."
그래서일까, 영화 화장에서는 도약을 갈망하는 노감독의 바람이 현실에 단단히 뿌리내린 '사실주의'를 통해 감각적인 열매를 맺는다.
"작가 김훈의 간결하면서도 묵직한 문장의 힘을 영상으로 옮긴다는 게 쉽지 않았어요. 수렁에 빠져 어떻게 나와야 할지 모를 만큼 힘겨웠죠. 여기서 빠져나온 계기가 사실적인 영상을 통해서였습니다. 김훈 선생의 글을 잘못 따라가서는 안 되니, 사실감을 제 나름의 기준으로 삼자고 마음먹었죠."
임 감독은 "젊을 때는 치장을 하면서 영화를 찍었는데, 80세 들어서는 그 치장을 없애고 보이는 만큼 화면에 담게 되는 것 같다"고 전했다.
"지금 떠올려보면 '축제'(1996)라는 영화에서는 죽음을 굉장히 치장했던 것 같아요. 스스로를 미화시키는 사람이 되고자 했던 거죠. 지금은 그런 것이 싹 빠졌습니다. '오면 맞이할 뿐'이라는 생각이 화장의 주인공 오상무를 연기한 배우 안성기에게도 그대로 담겼어요. 단지 지금은 팔십 먹은 노인이 찍은 영화를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봐 내고 있을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