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매가 시작된 지 이틀째 이른바 '광클'(예매 클릭을 미친 듯이 하는 일)의 천신만고 끝에 구해낸 결실이었습니다. 그것도 홈플레이트 바로 뒤편 황금 자리 지정석, 혹시 있을지 모를 취소 좌석에 대한 불굴의 정신으로 이뤄낸 쾌거였습니다.
그렇게 수빈 씨의 생애 첫 대전 경기 직관기는 시작됐습니다. 시즌 10번째 만원 경기에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고생한 보람이 있었던 대전 직관
"야, 늦었다. 1회는 벌써 지났겠다" 호들갑을 떨며 들어선 대전 한화생명 이글스파크에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대전 구장 생각보다 엄청 좋구나. 잠실, 문학과 달리 아담한 맛이 있네." (지난 시즌 뒤 새 단장을 마친 구장이었습니다.)
부랴부랴 경기를 지켜봤지만 웬걸 부푼 기대는 초반 사그라들었습니다. 4월의 MVP 안영명이 선발 등판한 한화는 3회초까지 대량실점, 0-6까지 끌려갔습니다. 모처럼 대전까지 왔는데 수빈 씨는 "오늘은 안 되나 보다"며 혜리 씨와 쓰디쓴 맥주에 치킨을 곱씹었습니다.
하지만 곧 장시간 운전이 아깝지 않을 명승부가 펼쳐쳤습니다. 3회말 2점, 4회 1점을 따라붙은 한화는 7, 8회도 1점씩을 내며 5-6까지 추격했습니다. 승패 없이 경기를 즐기자던 수빈, 혜리 씨도 응원의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0-6, 열세를 뒤집은 믿기 어려운 대역전극으로 수빈 씨의 생애 첫 대전 직관기는 화려하게 마무리됐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각. 육신의 피곤함이 몰려왔지만 정신은 새털처럼 가벼웠고, 스트레스가 가셔 한없이 명징했습니다. 새로운 한 주를 너끈하게 버틸 힘을 얻었습니다.
▲한화 '마약 야구'에 중독되다
수빈 씨는 원래 다른 팀 팬이었습니다. 한국 최고의 인기 구단 중 하나로 꼽히는 고향팀을 어릴 때부터 응원해왔습니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1년에 서너 번 야구장을 찾았습니다.
그랬던 수빈 씨는 지난해 야구와는 담을 쌓았습니다. 회사 업무가 고되기도 했지만 고향팀이 잇따라 가을야구를 하지 못하면서 자연스럽게 관심도 멀어졌습니다. 수빈 씨는 "재작년까지는 야구를 봤는데 지난해 끊었다"면서 "재미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올해 다시 야구에 대한 열정이 살아난 겁니다. 고향팀이 아니라 아예 연고가 없던 한화가 수빈 씨의 열정에 불을 지폈습니다. 수빈 씨는 "우연히 9회말 김경언의 끝내기 안타가 나오는 경기를 보게 됐는데 정말 재미있었다"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선수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다 한화 경기를 보니 그 매력에 흠뻑 젖어든 겁니다. 수빈 씨는 "하루하루 짜릿한 승부가 좋다"면서 "올해 한화가 3연패가 없는데 두 번 지면 반드시 이기는 모습이 더 좋다"고 했습니다.
스스로도 한화의 '마약 야구'에 중독된 것을 느낍니다. 수빈 씨는 "기사 댓글에 '마리한화'라고 하는데 정말 재미있다"면서 "정말 한화는 전혀 모르던 팀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도 단단히 거기에 중독됐다"고 웃었습니다. 이어 "원래 고향팀을 응원했지만 올해는 다르다"면서 "정말 한화는 영원히 한화 팬일지 모르겠지만 올해만큼은 맞다"고 고백했습니다.
▲한화의 야구에서 삶의 힘을 얻는다
수빈 씨의 '변절'(?) 이유는 한화 야구가 보여준 희망 때문입니다. 만년 꼴찌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굴의 투지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겁니다. 수빈 씨는 "아는 미용실 직원도 한화 팬인데 '성적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고 모든 걸 극복했다'고 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한화는 희망이 없는 팀이었습니다.
그러나 김 감독이 부임한 이후 선수들이 똘똘 뭉쳐 달라진 겁니다. 수빈 씨는 "트레이드돼서 온 선수들도 사연이 있는 걸로 아는데 감독님을 믿고 키워지는 모습이 감동적이더라"면서 "끝까지 포기를 모르는 모습이 팬들에게 희망을 줬다"고 했습니다.
이런 한화의 야구에 일상 생활을 하는 데 큰 힘이 된다는 겁니다. 수빈 씨는 "보통 경기 초반을 보면 승패의 답이 나온다"면서 "그러나 한화는 1점씩이라도 내면서 끝까지 따라갔다"는 데 주목했습니다. 이어 "안 되는 경기에도 노력하고 포기하지 않는 야구에 요즘 힘든 일상에 나도 포기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갖는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이어 "감독님도 결정적인 순간 마운드로 올라오는데 투수들이 쉬라고 어기적어기적 느리게 걸어오는 모습이 정말 귀엽다"고 말합니다. 40살 차이, 아버지 뻘도 넘은 김 감독에게 수빈 씨는 "말투도 귀여워서 요즘 감독님의 '~하지 않나 시포요'를 따라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저런 모습들에 팬들이 한화 경기에 매료됩니다. 수빈 씨는 "6만 원짜리 좌석이었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면서 "17일 경기는 내 생애 최고의 명승부였다"고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이어 "힘든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장 신나는 때가 요즘이고 가장 야구에 관심이 가는 시즌"이라는 수빈 씨는 한껏 고무된 목소리였습니다. 평범한 직장인이자 야구 팬이었던 수빈 씨의 생애 첫 대전 경기 직관기이자 고향팀을 잠깐 등진 변절기이자 '마리한화' 중독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었습니다. 남자 친구가 아닌 여자끼리만 갔던 직관이 결코 아깝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김성근 감독과 한화가 보여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의견입니다. 수빈 씨는 "권혁 등 필승조가 혹사라고 하지만 팬들은 감동한다"면서 "가을야구까지는 바라지 않고 열심히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하는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다음 한 마디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수빈 씨는 "비록 지금 중간 성적이어도 그게 시즌 끝까지 그런다 해도 감동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다르다"면서 "꼴찌에서 올라간 중간은 충분히 감동을 준다"고 했습니다. 이어 김성근 감독에 대해서도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 정말 오래 사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 기사는 17일 대전 한화-넥센의 경기를 직접 관전한 지인의 경험을 토대로 작성됐습니다. 다만 직장에서 다음 날 출근을 앞둔 일요일 지방에 갔다가 밤 늦게 돌아와 업무에 지장을 준다는 지적을 할까 봐 한사코 실명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했습니다. 직장 상사도 '마리한화'의 효능을 안다면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할 테지만 일단 수빈, 혜리 씨의 안위를 위해 가명 처리한 데 대해 독자 여러분들의 양해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