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불능 '메르스'…'영화'보다 참담한 '현실'

[문화연예 메르스 기획 ①] 바이러스 창궐 다룬 재난영화로 짚어본 사회적 파장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가 빠르게 확산되면서 국민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또 여행과 영화, 공연 등 문화 산업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CBS 노컷뉴스는 '메르스 사태'가 문화 산업에 미칠 파장과 이를 바라보는 문화연예계 내부의 목소리를 전하는 연속 보도를 마련했습니다. [편집자 주]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확산사태와 관련해 정부가 대응 단계를 '주의'로 유지키로 한 2일 오후 서울 명동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마스크를 착용한 채 관광을 하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카뮈(1913~1960)는 소설 '페스트'를 통해 비극적인 현실 속에서도 의연한 자세로 운명과 대결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소설 속 무서운 전염병이 휩쓴 폐쇄된 도시에서, 재앙에 대응하는 이들의 모습은 각기 다르게 묘사된다. 반항 한 번 못해 보고 맥없이 목숨을 내주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떻게든 질서를 찾으려 애쓰는 사람도 있다.

"신이 내린 심판의 결과물이자 숙명"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도 있다. 그들 곁을 지키는 의사 리유는 환자의 물집을 째서 고름을 뽑아내는 등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수행한다.

카뮈는 소설 페스트를 통해 잔혹한 현실과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이야말로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진정한 반항이요 삶에 대한 긍정이라고 전한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 권리를 지닌 우리에게는, 공동운명체로서 재앙에 맞서 연대하고 행동해야 할 각자의 이유가 있다는 점과도 맞아떨어지는 대목이다.


이러한 카뮈의 메시지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현돼 왔다. 영화도 그러한 통로로서 큰 몫을 해 왔다. 최근 몇 년 사이 소개된, 바이러스 창궐을 다룬 재난영화를 통해 메르스 사태에 직면한 한국 사회의 현실을 짚어본다.

◇ '감기'…대재앙 앞에서도 존엄 잃지 않는 평범한 이들의 얘기

'호흡기로 감염' '감염속도 초당 3.4명' '치사율 100%' 2013년 여름, 사상 최악의 바이러스가 대한민국을 덮친다. 밀입국 노동자들을 분당으로 실어 나른 남자가 원인불명의 바이러스에 감염돼 사망한다. 환자가 사망한지 채 24시간이 되지 않아 분당의 모든 병원에서 동일한 환자들이 속출한다. 사망자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만, 시민들은 무방비상태로 바이러스에 노출된다.

사상 최악의 바이러스에 정부는 2차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국가 재난사태를 발령하고, 급기야 도시 폐쇄라는 초유의 결정을 내린다. 피할 새도 없이 격리된 사람들은 일대혼란에 휩싸이게 되고, 대재난 속 사랑하는 이들을 구하기 위한 사람들과 죽음에서 살아 남기 위한 사람들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다.

김성수 감독이 연출한 영화 '감기'(2013)는 대재앙 속에서도 존엄성을 잃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동시에 그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국가권력이 올바로 서야 한다는 점을 드러낸다. 극중 '바람직한' 대통령 캐릭터가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영화의 개봉 당시 김성수 감독은 "자신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극한의 공포심, 혹은 인간성의 상실, 그럼에도 인간애와 휴머니즘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고 연출 의도를 전했다.

◇ '월드워Z'…살아도 사는 게 아닌 '좀비' 상태 벗어나려는 사투

세계 곳곳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12초 만에 사람을 좀비(살아 있는 시체)로 만드는 바이러스가 창궐한 탓이다. 좀비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도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전 UN 소속 조사관 제리(브래드 피트)는 위험한 상황에서 가까스로 가족들과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렇게 제리는 이제껏 본적 없는 대재앙 앞에서 인류를 위협하는 존재와 직면하게 되고, 그들의 끊임없는 공격에 맞서 필사의 사투를 벌인다.

할리우드 톱스타 브래드 피트가 제작과 주연을 맡은 영화 '월드워Z'(2013)는 좀비 바이러스의 창궐을 목도한 주인공이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고군분투하는 여정을 따라간다. 바이러스의 위협 탓에 벌어지는 사건들을 주인공의 눈으로 쫓으면서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여 주는 셈이다.

이 영화는 악마처럼 생긴 좀비를 깨부수는 기존 할리우드 영화 문법에서 벗어나, 좀비 바이러스의 창궐을 부른 인류에게 그 책임을 묻고 성찰의 계기를 마련할 것을 요구한다. 극중 좀비 바이러스가 환경문제도, 정치 경제 사회적 양극화도, 세상의 부조리를 외면하려는 나태함으로도 읽히는 이유다.

◇ '컨테이젼'…전염병이 빚어낸 개인의 변화·갖가지 사회현상 르포처럼 담아내

어느 날 홍콩 출장에서 돌아온 베스(기네스 팰트로)가 발작을 일으키며 사망한다. 그녀의 남편(맷 데이먼)은 그 원인을 알기도 전에 아들마저 잃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같은 증상으로 사망한다. 일상생활의 접촉을 통해 이뤄지는 전염은 그 수가 한 명에서 네 명, 네 명에서 열여섯 명, 수백·수천 명으로 늘어난다.

미국 질병통제센터의 치버 박사(로렌스 피시번)는 경험이 많은 박사(케이트 윈슬렛)를 감염현장으로 급파하고, 세계보건기구의 오란테스 박사(마리옹 꼬띠아르)는 최초 발병경로를 조사한다. 이 가운데 진실이 은폐됐다고 주장하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주드 로)가 촉발한 음모론의 공포는 그가 운영하는 블로그를 통해 원인불명의 전염만큼이나 빠르게 세계로 퍼져간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컨테이젼'(2011)은 '전염' '전염병'을 뜻하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느 날 갑자기 발병해 전 세계로 퍼지는 전염병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개개인의 달라진 삶과 갖가지 사회현상을 르포처럼 펼쳐낸다.

이 영화는 특정 배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지 않고 전염병이 발병한 여러 곳에 있는 다양한 인물을 비추는 방식을 택했다. 발병 이후 120일간 지속되는 공포와 혼돈의 현실, 그리고 극적인 희망의 씨앗을 다각도로 보여 줌으로써 여타 재난영화와 결을 달리한다.

◇ '괴물'…부조리한 세상 바로 세우는 주역은 결국 시민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한강 둔치 위로 올라와 사람들을 거침없이 깔아뭉갠다. 한강 둔치에서 아버지(변희봉)의 매점 일을 돕는 강두(송강호)는 뒤늦게 딸 현서(고아성)를 데리고 도망치지만, 현서의 손을 놓치고 만다. 그 순간 괴물은 현서를 낚아채 유유히 사라진다.

한국 경찰과 군 당국, 그리고 미군은 바이러스 설을 운운하며 한강을 모두 폐쇄하고, 도시 전체는 마비된다. 강두는 바이러스 감염 여부를 검사하는 병실에서 죽은 줄 알았던 현서의 전화를 받고 딸이 살아 있음을 알게 되지만, 정부 관계자들은 강두의 말을 믿지 않는다.

결국 현직 양궁선수인 강두의 여동생 남주(배두나)와 전직 운동권 출신 남동생 남일(박해일)을 위시한 강두 가족은 바이러스 감염자를 모은 격리 시설에서 탈출해 현서를 구하러 나선다.

봉준호 감독이 연출한 영화 '괴물'(2006)은 정체불명의 괴물에게 잡혀간 어린 딸을 잃어버린 한 가족이 모든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도 딸을 구하고자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극중 괴물에 맞서 싸우는 주인공들이 평범한 시민들이라는 점이 특히 눈길을 끈다.

이 영화는 2000년 발생한 주한미군의 한강 독극물 방류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미국 국방부가 생물학 테러에 흔히 사용되는, 살아 있는 탄저균 샘플을 주한미군 오산 공군 기지에 보낸 충격적인 사건과도 겹쳐져 씁쓸함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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