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길영 충남대 영문과 교수가 19일 CBS 노컷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창비는 이제 '백낙청 체제' 50년의 빛과 어둠을 살필 필요가 있다. 그 핵심은 창비가 안팎으로 더 많은 다양한 목소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면서 이같이 주장했다.
오 교수의 주장은 '신경숙 표절' 논란과 관련해 처음으로 '백낙청 책임론'을 공식 거론하는 것이어서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백낙청은 계간 '창작과 비평' 편집인이자 창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현재 미국에 체류 중인 오길영 교수는 전날 발표한 창비의 사과문에 대해서도 '논점을 흐리는 애매한 내용으로 채워졌다"면서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창비의 실망스런 사과는 결국 창비 내에 자리잡고 있는 공고한 백낙청 체제 때문에 비롯됐다는 것이 그의 시각이다.
그는 "신경숙 표절 논란에 대한 핵심은 백낙청 선생이 이번 사태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백낙청 선생이 '신경숙은 훌륭한 작가'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어 창비의 사과 내용도 근본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모든 체제는 그것이 아무리 잘 짜여졌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생명력과 활기에 적대적"이라고 강조했다.
오 교수는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온 창비를 보면 '답답하고 구태의연하며 구시스템에 대한 신화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면서 "창비가 진지하게 새로운 시스템을 고민하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백낙청 체제를 넘어 새로운 목소리를 담아내고 내부의 활력을 북돋아 제2의 창간 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전날에는 "신경숙 표절 문제에는 창비와 문동(문학동네)라는 한국문학계의 권력집단과 베스트셀러 작가의 공생관계가 깔려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오길영 교수는 전화 인터뷰 내내 담담하고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백낙청 선생은 나의 석박사과정 스승이었다"면서 "마음 한 켠이 쓰리지만 창비와 선생님에 대한 애정을 담아 말씀을 드리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날 오전 자신의 입장을 담은 '창비와 백낙청 체제 50년'이라는 글을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올리기도 했다. 오 교수의 정확한 입장을 독자에게 전하기 위해 그의 동의를 얻어 전문을 함께 싣는다.
- 이번에 다시 나온 창비 대표의 사과는 실망스럽다. 마치 이 정권이 그간 내놓은 숱한 사과들, 논점을 흐리는 애매한 사과문의 예를 다시 보는 느낌이다. 진솔한 사과를 하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정치권력과 문학권력은 그렇게 닮아가나 싶다. 그래서 나는 창비 경영진이 아니라 계간 창비 편집위원들의 솔직한 입장을 듣고 싶다. 여기에는 백낙청 편집인도 당연히 포함된다.
- 창비와 백낙청이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많은 이들에게 창비=백낙청으로 인식된다. 나는 이 등식에 창비의 백낙청 체제 50년의 공과가 담겨 있다고 본다. 나는 '백낙청 독재 50년' 운운하는 거친 비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런 거친 언사에 담긴 문제의식만큼은 새겨야 한다고 본다.(최근 나온 고종석의 거친 언급도 한 예이다.) 사람들이 창비와 백낙청을 등치하게 되었다면 거기에는 그만한 문제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거친 언사의 표현방식에 집착할게 아니라(나는 어떤 경우에도 거친 언사에는 공감하지 않는다), 그런 인식의 문제의식에 주목해야 한다.
- 나는 창비가 내세우는 이런저런 체제론에 공감하지 않는 편이지만, 창비식 개념을 빌면, 창비는 이제 '백낙청 체제' 50년의 빛과 어둠을 살필 필요가 있다. 나같은 외부인이 함부로 할 말은 아니지만, 그 핵심은 창비가 안팎으로 더 많은 다양한 목소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의미에서 백낙청 체제를 깨야 한다. 이것도 편견이겠지만, 내게 창비와 결부되는 이미지는 언제부턴가 체제, 믿음, 시스템, 신화 등이다. 그러나 어느 작가의 예리한 표현대로 "믿음에의 강요"나 "신화"는 문학의 적이다. 범접할 수 없는 '백낙청 신화'(더 적합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도 예외는 아니다. 문학에서, 특히 비평에서 그 어떤 누구도, 대상도 비판의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내 생각에 문학은 체제와 믿음과 신화의 개념보다는 불신과 질주와 반체제와 탈신비화와 비판과 해체와 무정부주의에 친연성을 지닌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조이스가 모든 시스템을 비판하는 무정부주의자를 자처한 까닭이다. 들뢰즈 식으로 표현하면 문학은 체제가 아니라 반체제, 수목이 아니라 리좀, 영토화가 아니라 탈영토화, 정주가 아니라 도주와 관련된다. 그렇다면 창비의 이미지는 어느 쪽과 가까운가. 창비 구성원들은 냉정하게 점검해볼 일이다.
- 내 생각에 창비는 백낙청을 정점으로 하는 견고한 믿음의 체제를 이룬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창비의 출간물에서 백낙청은 건드릴 수 없는, 건드려서는 안되는(untouchable) 존재이다. 물론 그런 백낙청 체제가 거둔 성취가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렇지만 모든 체제는 그것이 아무리 잘 짜여졌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생명력과 활기에 적대적이다. 적어도 이 점에서는 나는 들뢰즈의 '리좀' 이론에 동의한다. 한때는 효율적이었던 체제도 시간이 경과하면 굳어진다. 굳어지면 생명력을 잃는다. 지나친 판단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의 신경숙 사태는 창비의 백낙청 체제 50년이 새로운 단계로 이행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징후로 읽는다. 다소 무리한 얘기를 하는 이유는 적어도 내가 읽어본 바로는, 백낙청 체제에서 백낙청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 자기의 고유한 비평적/이론적 영토를 개척한 비평가나 이론가를 (적어도 나는)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무리를 감수하고 표현하자면, 백낙청 체제의 창비 비평가나 이론가들은 백낙청의 에피고넨(아류)이 아닐까. 이런 판단이 잘못 된 것이라면 바로 잡아주길 바란다. 경청하겠다. 창비 시스템 안에서 백낙청과 다른 목소리를 내온 이론가나 비평가가 누가 있는가.
-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 비판적 지적은 지난 수십년 동안 '한국문학공화국'에서 백낙청 비평이 이룩해온 거대한 문학적 성채의 가치를 십분 인정하고 하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 성채의 위용 앞에 주눅 들거나, 그 성채를 '신화'로 만든다면 그것은 '한국문학공화국'의 정신에 어긋난다. 비평은 언제나 거인의 어깨를 딛고 일어서서 다음을 내다 봐야 한다. 거인의 그늘에 안주하면서 안온함을 즐기는 비평가를 바라보는 건 안타깝다. 조심스러운 얘기지만, 나는 지금 창비가 지닌 문제는, 창비 안에 감히 백낙청의 비평적 입장과 견해를 거스르려는 목소리가 매우 적거나, 심지어 없는 데서 발생한다고 판단한다. 이견을 못내는 비평가를 우리는 누군가의 아류라고 부른다.
- 지금의 신경숙 사태도 마찬가지다. 과연 백낙청이 신경숙 작품의 가치를 그간 줄곧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면 창비의 납득할 수 없는 해명이 나올 수 있었을까. 백낙청이 이번 출판산의 해명에 관여했는지 안했는지 모르겠으나, 그 직접적 관여 여부와는 별개로 '백낙청 체제'의 어떤 측면과 이번 해명이 관련된다는 판단은 든다.
- 이런 나의 지적을 내부 사정을 모르는 사람의 곡해라고 치부한다면 나로서는 할 말은 없다. 아마도 창비는 또다시 이런 지적은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해명을 내놓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젝의 날카로운 지적대로, 현실은 곧 이미지와 허구이고, 이미지와 허구가 곧 현실이다. 그 둘을 날카롭게 구분할 수는 없다. 창비가 스스로 생각하는 창비의 내부 '실상'이 어떻든 상관없이, 나를 포함한 적지 않은 외부인들에게 창비가 이런 인상을 주고 있다면, 그리고 그런 판단이 아주 뜬금없는 게 아니라면, 창비는 이런 지적을 아프게 새겨야 한다. 단지 신경숙 파문을 어떻게든 빨리 수습하는게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창비의 중요한 '상품'을 지키는게 문제가 아니다. 한국문학의 거점역할을 해왔던 창비가 앞으로의 새로운 50년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뭔가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조언으로 새겨야 한다.
- 비판은 곧 애정의 표현이다. 애정이 없다면 굳이 비판할 이유도 없다. 무시하면 그만이다. 창비의 오랜 애독자로서 나는 최근의 창비에 실리는 글들에 대체로 실망해왔다. 일종의 '자족주의'를 글을 읽으면서 느껴왔다. 그 실망의 원인에 대해서 한 독자이자 비평가로서 이런저런 궁리도 해봤다. 위의 두서없는 생각들은 그런 궁리의 표현이다. 다시 말한다. 창비는 이번 신경숙 파문을 계기로 백낙청 체제 이후의 단계를 심도깊게 고민해야 한다. 백낙청 체제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백낙청이 50년전 창비를 창간하면서 표명했듯이,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를 다시 모색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신경숙 파문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는 중요한 시험대이다. 창비와 백낙청의 지혜로운 판단을 기대한다.
- 사족: 이렇게 백낙청에 대해 적고 있자니 마음 한 켠이 쓰리다. 백낙청 선생은 사적으로는 내게 (영)문학으로의 길을 결정적으로 이끌어준 탁월한 인도자였고, 유학을 떠나기전 석박사과정의 스승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몇년간 백낙청 체제의 창비에 대해 마음에 품고 있던 불편한 생각을, 이번 신경숙 파문을 계기로 나도 정리하고 싶어서 적은 단상이다. 이걸로 신경숙과 창비에 대한 얘기는 당분간 그만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