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소설 '아리랑' '태백산맥'이 떠오르네요

"운명처럼 암흑의 시대에 맞서 싸우고 버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이들의 얘기"

왼쪽부터 배우 이정재, 전지현, 하정우, 최동훈 감독이 지난 22일 서울 압구정CGV에서 열린 영화 '암살' 제작보고회에 참석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알려 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

순제작비 180억여 원을 들인 대작 '암살'(감독 최동훈, 제작 ㈜케이퍼필름)에 나오는 짧지만 강렬한 대사다.

영화 암살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경성과 상하이를 배경으로, 일본군 고위급 장교와 친일파 암살에 투입된 독립군, 청부살인업자 등의 쫓고 쫓기는 긴박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개봉을 한 달 앞둔 지난 22일 서울 신사동에 있는 CGV 압구정점에서 열린 제작보고회를 통해 살짝 베일은 벗은 영화 암살은, 작가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 '태백산맥'과 일맥상통하는 서사·캐릭터의 향연을 예고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35년간의 처절한 민족 수난사를 길어 올린 소설 아리랑에는 방대근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사람이 곧 하늘'인 세상을 꿈꾸며 동학농민혁명에 나섰던 소작농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의 기둥인 형마저 먼 땅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보내야 했던 그다.

우여곡절 끝에 독립군이 돼 목숨을 걸고 중국과 소련, 식민지 조선을 오가며 치열한 독립운동을 펼치는 방대근의 눈을 통해, 소설은 가치관과 이념은 달랐어도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죽음까지 불사했던 이름 없는 군상의 삶을 오롯이 전한다.


영화 암살이 다루는 1930년대는 나라 안팎에서 일제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는 목소리가 극에 달했던 시기지만, 해방 투쟁의 조직적인 움직임 역시 차곡차곡 쌓이던 때이기도 하다. 연출을 맡은 최동훈 감독도 이 점에 주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날 제작보고회에서 최 감독은 "저도 그렇지만 젊은이들이 1930년대를 포함한 일제강점기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그 시대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에 책을 보고 공부도 많이 했다"며 "당시 독립운동을 하던 이름 모를 분들의 사진을 보면서 들었던 '이분들은 어떤 의지를 갖고 살았을까'라는 질문에서, 그분들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영화를 시작했다"고 전했다.

◇ '암살'의 염석진과 '태백산맥'의 염상진은 어떤 관계일까?

영화 암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캐릭터는 임시정부 대원 염석진이다. 그가 일제강점기를 다룬 소설 아리랑과, 해방 뒤 피로 물든 1950년대 한국전쟁까지의 현대사를 그린 소설 태백산맥을 잇는 연결고리와 같은 캐릭터로 여겨지는 까닭이다.

배우 이정재가 연기한 염석진은 15년간의 뛰어난 활약을 통해 김구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데, 1911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으로 감옥에 갇혔다가 열흘 만에 탈출한 인물이다.

제작보고회에 함께한 이정재는 "처음 시나리오를 보고 염석진이라는 인물에 접근하면서 벼랑 끝에 몰려 있는 그의 정서를 최대한 이해하고 자연스레 그 느낌에 깊이를 더하고 싶은 욕심이 컸다"며 "재밌게 볼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영화인 만큼 보신 뒤 많은 생각과 질문, 토론이 오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극중 염석진이라는 이름은 소설 태백산맥에서 거대한 이야기의 큰 줄기를 담당하는 인물인 염상진을 떠오르게 만든다.

소설 속 염상진은 일제강점기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벌이다, 해방 뒤 미군정의 비호 아래 다시 친일파들이 득세하게 된 남한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는 신념의 화신이다.

또한 소설 아리랑은 만주에 정착했던 조선인들이 일제 패망 소식을 접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또 다른 절망과 맞닦뜨리게 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결국 강대국의 지배 논리에 떠밀려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을 얻을 기회마저 놓쳐 버린 우리네의 비극을 그린 소설 태백산맥과 아리랑은 그 아픔의 맥을 같이 하고 있는 셈이다.

이름마저 비슷한 영화 암살의 염석진과 소설 태백산맥의 염상진이 시대가 낳은 비극적인 인물이라는 거울상으로 생각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비극은 영화 속 "알려 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라는 대사와 겹쳐지면서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인상을 남긴다. 그 쓰디쓴 열매가 남북 분단이라는 참담한 현실로 남아 여전히 우리 삶을 옥죄고 있기 때문이다.

◇ 여성과 낭인…비극의 시대를 함께 이겨내 온 비주류의 삶들

배우 전지현이 지난 22일 서울 압구정CGV에서 열린 영화'암살' 제작보고회에 참석해 머리를 넘기고 있다. (사진=황진환 기자)
영화 암살은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를 등장시킨다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배우 전지현이 연기한, 강한 신념으로 무장한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이 그 주인공이다.

최 감독은 "제가 본 독립군 사진 가운데 여성분이 앉아 있는 사진에서 서글픔 같은 것이 느껴졌는데 '이분들 중 한 분이 암살단이라면'이라는 생각에서 안옥윤 캐릭터를 그리게 됐다"며 "그녀는 총보다는 운명에 맞서 싸우는 캐릭터"라고 설명했다.

제작보고회에서 전지현은 "여배우가 중심에 서는 영화를 찾기 힘든데,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를, 그것도 최 감독님의 작품에서 맡게 돼 영광이었다"며 "촬영을 하면서 독립에 대한 마음을 느끼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우리 영화가 관객들에게 그러한 힘을 줄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 영화에서 하정우가 맡은 하와이피스톨은 현실과 영화적 상상력의 경계를 허무는 캐릭터로 다가온다.

하와이피스톨은 돈만 주면 국적·성별·나이를 불문하고 누구든지 처리하는 상하이의 청부살인업자로, 누군가로부터 거액의 의뢰를 받고 경성으로 건너가 안옥윤의 뒤를 쫓는다.

하정우는 "전작들을 통해 늘 설레게 만드는 이야기와 캐릭터를 선보여 온 최 감독님이 언제 불러 주시나 기다리던 입장에서 제안을 받았을 때 망설이지 않고 선택했다"며 "하와이피스톨 캐릭터로 무엇을 보여 주고 싶었는지에 대해 가장 궁금했기에 촬영 전부터 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준비했다"고 했다.

최 감독은 "안옥윤이라는 강인한 여성상과 유명한 레지스탕스로서 깡패 같기도, 선비 같기도 한 염석진 캐릭터를 만든 뒤 이 모두를 휘젓는 하와이피스톨을 떠올렸다"며 "그는 세상을 등지고 살던 낭인으로, 이야기보다는 캐릭터적인 면을 우선시해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실시간 랭킹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