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마흔 일곱 번째 생일날이었다.
기뻐해야 할 날에 가장 힘들고 괴로운 순간을 맞이했다.
A4 용지 석장분량의 짧지 않은 사과문에는 사죄에서부터 죄송, 참담, 통감과 같은 단어들에서 고심한 흔적이 배어있었다.
이 부회장은 환자와 가족들의 불안과 고통을 얘기하면서 1년 넘게 입원중인 자신의 아버지 이건희 회장 얘기도 꺼냈다.
간간히 떨리고 눈시울도 붉어진 이 부회장은 발표장을 들어갈 때나 나올 때나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번 메르스 사태가 진행되면서 삼성서울병원이 환자를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한 진앙지가 된 데 대해 엄청난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이 같은 분위기속에 이 부회장이 직접 국민 앞에 나와 사과를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고 부담일 수 밖에 없었다.
즉 대표성과 책임감을 확실히 보여주는 자리가 됐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날 전격적인 사과로 비쳐지긴 했지만 삼성측으로서는 이 부회장의 직접적인 대국민 사과 D-day를 고심해 왔고 어느 정도 진정국면에 접어든 시기를 택하려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발표를 앞두고 지원대책 등에 대한 준비로 다소 시간이 걸렸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이날 발표에서는 사과와 함께 환자를 끝까지 치료하겠다는 상징적인 표현만 있을 뿐 구체적인 지원 조치와 관련해 그 규모나 액수는 언급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 사과는 ‘이제부터 시작’임을 알리는 싸인일 수 있다.
이 부회장에게는 지금 삼성이 국민의 신뢰를 다시 찾고 최고의 기업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갑절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부회장으로서는 지금 삼성물산 합병과 관련해 예기치 않은 복병 엘리엇을 만나 창과 방패의 힘겨운 싸움을 주고 받고 있다.
여기에 이번 메르스 사태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작용해 화려한 데뷔는 커녕 가시밭길의 연속이다.
이날 대국민 사과도 삼성서울병원이 삼성공익재단 산하에 있어 삼성공익재단 이사장 자격으로 행한 것이다.
리더십의 시험대라는 시각도 있지만 그룹의 수장으로 길게 볼 때 정금처럼 나오기 위한 연단의 시기일 수 있다는 긍정적 해석도 나오고 있다.
이 부회장에게 삼성그룹의 수장이라는 자리가 짓누르는 무게와 국내외 환경이 얼마나 엄혹한지를 함께 절감하고 도전받는 기회가 됐을 법하다.
적어도 메르스 사태 진행과정에서 찾기 힘들었던 ‘이재용 리더십’을 앞으로 곳곳에서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