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내역을 보면 김일성 일가 초상화 1,700만 개 교체, 영생탑 4,000여 개 건립, 류경호텔과 만수대지구 초고층 아파트, 평양 민속공원, 만경대 물놀이장 건설 등 각종 선전용 토목공사, 50km에 달하는 수로공사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외에도 '4월 친선의 봄 예술축전', 군 열병식 행사 등 다양한 국가급 행사가 평양에서 열린다.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개인숭배 퍼레이드라고 할 수 있다.
이럴 때마다 남한 국민들은 미친 나라라고 비판에 열을 올린다. 그런데 다들 알고 있을까? 1950년대 이승만이 집권하던 시기에 현재의 북한과 비슷한 일이 매년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군중들은 이어 남산으로 몰려가 거대한 이승만 동상을 박살내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워낙 규모가 어마어마해 완력으로 끌어내릴 수 없었다. 동상 높이가 81척(25m)에 달하는 당시 세계 최고 높이의 동상이었으니... 결국 한달 후인 7월 23일 허정 과도정부가 공식적으로 철거명령을 내리고 8월 19일 중장비를 동원해 겨우 해체했다.
◇ 북한의 김일성-김정일 보다 앞선 ‘이승만 우상화’
한국전쟁이 끝나자 한반도의 남쪽은 이승만을 머리로 한 극우세력과 순박한 양민들만 살아남았다. 좌익은 물론 민주국가의 대들보가 되어야 할 중도세력마저 대부분 사라졌다. 이승만과 그를 따르는 친일세력이 마음껏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멍석이 깔린 것이다.
이때부터 노골적인 ‘이승만 우상화’ 작업이 벌어진다. 학교 교실마다 이승만 초상화가 내걸리고, 그의 생일날이면 집집마다 태극기를 걸었다. 이어 우표와 화폐에 이승만의 얼굴이 슬슬 등장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전국 곳곳에 이승만 동상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 우상화 작업의 압권은 바로 ‘이승만 80회 탄신일’이었다.
"이 겨레 위하시어 한 평생 바치시니 / 오늘에 백수홍안 늙다 젊다 하오리까 / 우리나라 대한 나라 독립을 위해 / 일생을 한결같이 몸 바쳐 오신 / 고마우신 이 대통령 우리 대통령 / 그 이름 길이길이 빛나오리다"
이승만의 80회 생일은 개인 일이 아니라 전 국가적 사업이자 전 국민을 총동원하는 축제였다. 자유당 정부가 발빠르게 움직였다. 먼저 정부 안에 ‘80세 탄신 경축위원회가 구성됐다. 이 위원회는 막대한 예산과 인력을 투입해 대통령 약사 편찬 기념도서관, 기념체육관, 육영재단 등을 차례차례 세웠다.
그러면 생일 당일인 1955년 3월 26일에 어떤 일이 벌어졌나? 당시 상황을 기록한 <대한뉴스>(제54호)에 담긴 이승만의 행적을 따라가보자.
"당일 아침부터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경무대(현재의 청와대)에서 ‘80회 탄신’을 축하하러 온 방문객을 맞느라 정신이 없었다. 외교사절로는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특별히 내한한 미국의 밴플리트 장군을 비롯해 필리핀 공사 테일러 우드, 콜터 장군, 김홍일 주 자유중국 대사, 왕동원 자유중국 대사 등이 잇따라 예방했다. 이어 국내 3부 요인을 비롯해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찾아와 ‘80회 탄신’을 축하했다. 접견을 마친 이 대통령 부부는 승용차 편으로 서울운동장으로 출발했다. 이 곳에서는 대대적인 경축행사가 준비되고 있었다. 시민과 학생 수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숙명여고와 배재고 남녀 학생들이 고전무용과 매스게임을 벌이며 잔치 분위기를 띄웠다.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이 대통령의 ‘80회 탄신’에 맞춰 ‘80’이란 숫자를 연출했고, 그 주변에 ‘만수무강’이란 글자를 만들었다. 군인들까지 대거 동원됐다. 서울운동장 하늘에는 전투기 여러 대가 공중 분열식을 벌였다. 오후에는 세종로에서 육군과 공군, 해병대 장병들이 생일을 축하하는 대규모 시가행진을 벌였다. 여기에는 국군의 날처럼 탱크부대까지 동원되었다."
◇ 우상화의 백미 “남산에 초대형 이승만 대통령 동상을 세워라”
이승만 생신을 축하하는 행사의 하이라이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조선신궁 자리에 이승만 동상을 세운다는 것이다. 이 동상은 조각가 윤효중이 10여 개월에 걸쳐 만든 작품이다. 연 인원 7만여 명과 그 당시 52만 달러에 달하는 2억 6,056만 환의 국가예산이 투입되었다.
이승만의 나이와 같은 81척(25m)으로 만들어 건립부지 3천여 평에 세웠다. 그 당시 보리고개니 초근목피로 근근히 먹고 살았던 국민들을 생각하면 참 서글픈 얘기다.
이 동상을 만든 조각가 윤호중란 인물이 흥미롭다. 그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친일 미술가이다. 일제가 만든 어용조직에서 열심히 조각 작품을 만든 인물이다.
윤호중의 공식적인 이력을 살펴보자.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4년 결전미술전에 친일 조소 작품을 출품한 경력이 있다. 이외에도 194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일본의 전통 풍습인 천인침을 소재로 한〈천인침(千人針)〉을 출품해 특선을 차지하는 등 친일 작품을 제작했다. 일제의 어용 교육기관인 대화숙에서 미술을 지도한 경력 등 친일 행적이 비교적 뚜렷한 편이다. 이로 인해 광복 직후 조선미술건설본부가 결성될 때 배제되기도 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미술 분야에 선정되었다."
해방 후 경력도 재미있다.
"1948년에서 1958년까지 홍익대학교 미술학부의 창설에 참가하여 동 조각과장, 미술학부장 등을 역임했다. 1951년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린 유네스코 국제예술가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했다. 1952년 스위스 만국박람회, 동 53년 영국 국제조각대회에 출품했다. 1953년 이래 국전 심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55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대한미술협회 부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57년에는 한국미술연구소의 개설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런 인물이 해방 후에도 미술계의 중진으로 살아 남아 이승만에게 충성을 바쳐 거대한 동상을 만들었으니 그 생존본능은 정말 감탄스럽다.
고려대 김성식 교수는 <사조(思潮)> 1958년 9월호에 '동상사태(銅像沙汰)'라는 제목의 글로 이러한 세태를 꼬집었다.
"지금 우리 나라에는 동상 사태가 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을 줄 수 있으리만치 적지 않은 동상이 세워지고 있다. 다른 나라에도 동상이 물론 안 세워진다는 것은 아니나, 특히 우리 나라의 동상 건립에 있어서 특색으로 되어 있는 것은 선진외국에서 별로 볼 수 없는 몇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생존한 인물의 동상을 세우고 있는 것, 둘째로 생존한 외국인의 동상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동상은 과거의 애국자에서부터 세우기 시작하자는 것, 또 어떠한 인물이든지 사후(死後)에 국민의 정확한 판단을 기다려서 후손의 손에 의하여 세워져야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처칠의 초상화 한 폭이 사후 10년이 지나고서야 하원의사당 벽에 걸리게 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
인천자유공원에 '살아 있는'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건립된 것이 1957년 9월 15일이었고, 권력에 빌붙은 사람들의 손으로 '살아 있는'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둘씩이나 만들어 세운 것 역시 1956년의 일이다. 대표적인 선비학자인 김성식 교수가 이 모두를 싸잡아 비판한 것이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최고 권력자를 찬양하는 용비어천가가 민족의 정의를 무너뜨리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