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중반에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세대에게 '라디오'는 지금의 '스마트폰'이다. 당시 라디오는 최신 팝송을 마음껏 들을 수 있는 플레이어였고 또래들의 고민을 공유하는 '카페'였으며 최신 정보를 가장 빨리 접할 수 있는 '포털'이기도 했다. 최신 유행과 엔터테인먼트를 24시간 제한없이(당시 TV는 밤 12시면 끝났다) 즐길 수 있는 '플랫폼'이었다. 라디오는 당시 청소년들의 24시간과 떨어질 수 없었다. 그 수요에 맞춰 나온 '아이폰'적 제품이 소니의 '워크맨'이었고 그 짝퉁 비스무리한 것이 삼성의 '마이마이'였다.
이들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에는 팝송 순위 차트인 '빌보트 차트'라는 것이 있고 이게 세계 팝시장의 척도이며 미국 주도권에 반발해 유럽 국가들이 '유러비전송 콘테스트'를 해마다 열어 견제하고 있다는 '거시담론'부터 '링 마이 벨'을 부른 애니타 워드가 사실은 수학교사 출신의 재원이고 '퀸'의 기타리스트인 브라이언 메이는 기타를 직접 만들 정도로 재능이 있다는 시시콜콜한 뒷얘기까지 얻을 수 있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없었으니 신곡이 나오면 PD들이 미국 출장을 가서 음반을 직접 사와야 들을 수 있었다. 이들 프로그램들은 'PD출장' 소식을 공지하며 청취자들의 기대감을 높이며 사세을 뽐내기도 했다. 물론 다른 통로를 통해 신곡의 목마름을 부분적으로 채울 수도 있었다. AFKN(당시 서울에서는 TV채널 4번이었다)의 '소울트레인'(SOUL TRAIN)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인터넷이 없다고 해서 일방통행이었던 것은 아니다. 엽서를 통해 신청곡과 사연을 올리고 자신의 이름이 라디오를 통해 불려지기를 기다리는 그 두근거림은 알만한 사람은 안다. 지금처럼 '1234'님처럼 번호로 불리는 익명이 아니라 '00동에 사시는 000님'으로 불리던 '실명의 시대'였다. MBC의 경우 라디오 프로그램에 들어온 엽서 가운데 예쁜 장식을 한 엽서만을 골라 '예쁜 엽서전'이라는 전시회를 해마다 열었고, 전시회는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다.
4,50대의 청소년 시절을 고스란히 가져갔던 명 DJ 김광한이 9일 세상을 떴다. 이종환은 이미 갔으니 그 시절 DJ는 김기덕, 황인용 밖에 남아 있지 않다. 소울트레인의 명진행자 돈 코넬리어스도 2012년 사망했다. 중년의 추억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DJ들이 스러져 가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낄 뿐이다.
P.S: 중년의 추억이 아이들에게는 악몽이 될 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해 동영상을 첨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