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영화 <암살> '안옥윤의 슬픔'을 감싸줄 나라가 그립다

휴일이었던 26일 시내 극장가는 영화 <암살>을 보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관람객들의 연령층은 다양했다. 청소년부터 젊은 연인들, 중년의 부부, 삼삼오오 몰려온 노인들까지. 인기를 반영하듯 개봉 3일 만에 누적 관객 수가 300만 명을 넘어섰다.

(사진=영화 '암살')
<암살>의 행간과 메시지가 선명하게 읽히기 시작한 시점은 독립운동가 염석진(이정재 역)이 일경에 정보를 팔아먹는 밀정(密偵)임이 드러나면서부터였다. ‘기억’과 '망각'이라는 상반된 단어가 내 머릿속에서 도르래처럼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암살>은 망각한 것들을 기억해 내라고, 집요하게 호소하는 영화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까지 쉽게 잊어버리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잘못된 기억 습관을 꾸짖는다. 일제로부터 강점당한 수치의 역사와 조선인의 정체성이 사라져버린 무망(誣罔)의 실존과 나라 잃은 원한에다 울분까지 모두 기억하라고 한다. 그뿐 아니다. 일제에 빌붙어 호의호식했던 친일 매국노들을 기억하라고 한다. 독립군 간부가 일경의 밀정 노릇을 하며 독립투사들을 때려잡게 했던 비극도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암살>은 선과 악의 ‘변신’에 대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독립투사 염석진은 김구의 총애를 받지만 자신에 대한 연민이 너무 강해, 조국 독립이라는 공동선을 향한 대의보다는 개인의 안위를 위해 시대와 타협한다. 조국과 상해임시정부와 동지들을 배신하고, 배신을 정당화한다. 파렴치한으로 변신한 것이다.


반면 살인청부업자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역)은 타인에 대한 연민이 강한 인물이다. 살해해야 할 대상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는 반성한다.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그의 동정과 연민은 이타심과 애국심으로 확장되어, 그를 영웅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영화 암살 포스터)
<암살>은 암울한 질곡의 시대를 넘어 운 좋게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대해 묻고 있다. 모두가 죽고 나만이 살아남았다는 데 대한 죄책감. 살아남았으나 정작 이 같은 시대를 만들기 위해 목숨 바쳐 싸운 것인지에 대한 회한과 부끄러움.

해방 후. 반민특위로부터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오는 독립운동의 배신자 염석진을 처단한 독립군 최고 저격수 안옥윤(전지현 역)의 얼굴은 슬픔과 허무로 뒤섞여 있다. 그녀의 총이 내뿜는 화약 연기와 허공을 울리는 총성이 안옥윤의 차가운 표정과 더불어 쓸쓸하게 기억되는 것은 왜일까. <암살>은 조국을 위해 일제와 싸우다가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린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왜 떳떳하지 못한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한다. <암살>이 던지는 숙제다.

독립군 최고 저격수 안윤옥은 슬프다.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그녀의 슬픔을 위로해 주고 그녀의 고독을 감싸 안아줄 수 있는 국가와 국민이 건재한 나라가 그립기 때문일 것이다. 안윤옥은 홀로 살아남아서 슬프고, 국가로부터 버림받아서 슬프고, 국민들에게 잊혀서 슬프다. 이것이 영화 <암살>의 화려한 컬러 뒤에 감추어진 실루엣이다.

살아남은 안옥윤은 동시대를 살다간 독일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가 1944년에 쓴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모른다. 세계대전이 종료된 뒤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을, 브레히트는 이렇게 토로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안옥윤의 슬픔을 감싸줄 나라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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