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박근령이 존경하는 '다카기 마사오' 는 누구인가?

[임기상의 역사산책 116] 조국을 버리고 왜군 장교로 들어간 조선 청년의 초상

만주군 예비소위 다카기 마사오(조선이름은 ‘박정희). 일본 육사 졸업 후 2달간의 사관 견습을 마치고 소위로 임관하기 직전인 1944년 6월말 일본군 소조(상사) 복장을 입은 모습이다.
1939년 3월 31일 만주국에서 일본인들이 발행하는 <만주신문>에 희한한 기사가 실렸다. 이 신문은 7면에서 '혈서 군관 지원'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렇게 보도했다.

"29일 치안부 군정사 징모과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교사) 박정희(23)군의 열렬한 군관 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 합격증명서와 함께 '한목숨 다 바쳐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담당자를 감격시켰다."

또, 이 신문은 박정희 훈도가 편지에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라고 적었다고 전했다.

1939년 3월 31일 만주국 <만주신문>에 실린 기사. 청년 박정희가 일본과 일본군에 충성을 맹세하는 글을 썼다며 '혈서 군관지원’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이 신문을 읽고 감동한 일본 관동군 수뇌부는 연령이 초과해 만주군관학교에 응시할 수 없는 이 조선 청년에게 응시자격을 주었다. 이렇게 해서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한 박정희는 1940년 4월에 이른바 '만주제국 육군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학했다.

당시 일제 치하의 조선 젊은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3가지였다. 조용히 생업에 종사하거나,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길, 그리고 적극적으로 일제에 협력해 '이름을 더럽히는 길'이었다. 권력지향적인 당시 국민학교('황국신민 학교'라는 의미·지금의 초등학교) 교사 박정희는 출세를 위해 일제의 주구(走狗)가 되는 길을 택했다.

◇ 만주군관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다


이 사진은 1942년 3월 24일 <만주일보>의 보도이다. 그 전날 만주국 수도 신경(현재의 장춘) 교외 라라툰에 있는 육군군관학교에서 열린 제2기 예과 졸업식 사진.
이 사진은 1942년 3월 24일 <만주일보>의 보도이다. 그 전날 만주국 수도 신경(현재의 장춘) 교외 라라툰에 있는 육군군관학교에서 열린 제2기 예과 졸업식 사진이다.

거수경례하는 생도가 만주국 황제 푸이(簿儀·일본제국이 세운 괴뢰국가 황제)가 내린 금시계를 받는 박정희이다. 이날 우등생 수상자는 모두 5명으로 일본계 2명, 만주계 2명, 그리고 조선계가 1명이었다. 그 조선계 1명이 바로 박정희 생도이다. 그는 나라를 버리고 일본의 괴뢰국가인 만주국에서 출세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졸업과 함께 그는 기다리고 갈망하던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출발한다.

박정희의 지인들은 그가 일본 육사로 들어가는 징검다리로 만주군관학교를 선택했다고 증언했다. 그의 뇌리에는 오직 '출세'만 들어 있었지, 조국의 해방이나 도탄에 빠진 조선민족은 안중에 없었다.

만주군관학교는 만주국 장교 양성을 위해 세운 사관학교이지만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었던 만큼 일본 육사의 분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군관학교 예과 졸업생 가운데 우등생을 뽑아 일본 육사에 편입시키는 특전을 베풀었다. 일본 육사에서도 박정희는 '빡세게' 공부했다.

일본 육사 생도 시절의 박정희(빨간 선).
박정희와 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같이 다닌 중국인 동기생 반의정 씨의 회고를 들어보자.

"교양수업이나 군사훈련 중에도 부동자세로 입술을 굳게 다문 그의 모습에 감히 타인이 쉽게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휴식 중에도 말수가 적고 타인과의 접촉을 삼갔는데, 가즈미(이한림의 창씨명)와는 종종 한국말로 무슨 얘기를 나누곤 했지요. 일본 육사에서 그와 같은 보병반에 속해 있었는데 그때도 학습과 훈련에만 열중했습니다."

박정희는 일본 육사에서 본과 2년 과정을 마치고 1944년 4월 유학생대를 3등으로 졸업한 후 소련-만주 국경지대인 치치하얼 주둔 관동군 635부대에 배속됐다. 당시 그의 계급은 '상사대우'였다. 3개월 후인 1944년 7월 1일 마침내 '황군 육군소위'로 임관돼 만주군에 배치됐다. 이 시기는 장준하와 김준엽 등 수많은 학병들이 일본군을 탈출해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시기였다.

만주군 포병이 전투하는 모습니다. 일본 관동군의 지휘를 받으면서 모택동이 지휘하는 팔로군과 조선 독립군을 토벌했다.
박정희는 임관 후 정확히 1년 1개월을 만주군 장교로 근무했다. 그는 만주군에서 어떤 일을 했을까?

박정희가 소속한 만주군 보병8단은 열하성 남부에 있는 반벽산에 주둔하고 있었다. 전체 병력은 약 3천 명 정도이고, 주임무는 그 인근에 있는 모택동의 팔로군 토벌이었다.

1939년경 조선독립군이 주도했던 '동북항일연군'이 소련령으로 피신했기 망정이지, 안그랬으면 박정희는 동족의 가슴에 총을 쏠 뻔 했다. 당시 팔로군은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와 연합하여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박정희의 만주군은 일본군의 보조 군대였다.

박정희와 같이 근무했던 중국인 동기생 고경인 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44년 7월 하순경부터 8월 초순경까지 보름간에 걸쳐 일본군과 합동으로 팔로군 토벌작전을 벌였는데, 8단에서는 2개 대대가 참가했다. 박정희는 부관을 하기 전 2~3개월 제2중대 소속으로 소대장으로 있으면서 이 작전에 참가했다."

박정희는 소대장에 이어 단장 부관으로 내근하다 일본 패망을 맞는다. 그에게 '대일본제국의 장군'으로 올라가려는 꿈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박정희를 포함한 8단내의 조선인 장교들은 현지 만주군 장교들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했다. 이들은 북경으로 도망가 뒤늦게 해방후 '광복군'에 편입됐다.

일본 패망 당일의 박정희 모습을 고경인씨로부터 들어보자.

"그날 오후 박정희를 만났는데 '이제 어떻하면 좋겠느냐'며 낙담한 모양이더군요. 그래서 내가 '우리하고 같이 가면 되지 뭐가 걱정이냐'고 위로해줬습니다. 박정희는 북경으로 떠나면서 '고국에 돌아가면 건국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쳤습니다."

8.15 해방과 함께 온 민족이 환희의 감동에 젖어있는 순간에 낙담하고 있는 저 조선인의 정체는 무엇일까? 물론 일제하에 일본군이나 만주군 군인이라고 무조건 친일파라고 재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황군의 장교'가 되기 위해 제 발로 군관학교를 찾아갔다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국군에 들어간 박정희, 남로당에 가입하다

여순사건 진압 작전에 참가한 박정희 소령(왼쪽에서 두 번째)과 송호성 사령관(세 번째). 이 작전이 끝나자마자 박정희는 체포된다
해방 후 대한민국 국군에 투신한 박정희는 1948년 11월 11일 남로당 가입 등 좌익 혐의로 군 수사당국에 체포된다. 박정희는 모진 고문을 받고 전향해 자기가 알고 있는 조직망을 모두 불고 석방된다.

다시 군에 복직한 박정희는 한국전쟁이 터지고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자 배를 타고 남쪽으로 탈출한다. 그리고 11년 후 부하들을 이끌고 한강 인도교를 다시 넘어 서울을 점령하는 '5.16 쿠데타'를 감행한다.

그리고 '종신집권'을 꿈꾸며 18년간 장기집권하다 가장 신뢰하는 부하의 총에 맞아 파란만장한 인생을 접는다. 이게 '박근령이 자랑스러워하는' 박정희, 다카기 마사오의 젊은 날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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