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꽃잎과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사이 20년의 간극은 한 여배우에게 어떠한 성장의 밑거름이 됐을까. 최근 서울 신당동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난 이정현은 "그동안 연기에 무척이나 목말라 있었다"는 표현을 여러 차례 썼다.
"꽃잎을 통해 연기의 맛을 느낀 뒤로 갈증이 컸는데, 들어오는 역할이 몹시 한정적이었어요. 그러던 중 테크노 음악에 빠졌죠. 가수 활동은 제가 좋은 곡을 받아서 콘셉트를 잡아 대중에게 어필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죠. 이후 중국에서 활동을 이어가기도 했는데, 연기에 대한 목마름은 해소가 안 되고 그리움은 여전했죠. 긴 슬럼프였어요. '은퇴한 것 아니냐'는 말도 들었는데, 너무 속상했어요."
이정현은 배우로서 다시 한 번 설 수 있는 힘을 준 사람으로 베를린영화제 단편영화 부문 금곰상을 받은 '파란만장'(2010)을 통해 만난 박찬욱 감독을 꼽았다.
"박 감독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어요. '단편영화를 찍는데, 여주인공을 맡아줄 수 있느냐'고요. 전화를 끊고는 너무 기분이 좋아 뛰어다녔죠. 감독님도 연락하기까지 고민이 많으셨다더군요. 제가 연기를 그만둔 걸로 아셨던 거죠. 파란만장 덕에 '범죄소년'(2012) 등에 연이어 캐스팅 될 수 있었어요. 박 감독님은 항상 '연기해야 한다'고 말해 주셨어요. 멘토 같은 분이죠."
= 사실 영화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 상영될 때도 관객 반응을 살피느라 몰입하기 힘들었다. 영화 상영 뒤 "잘 봤다"고 말해 주시는 분들이 많아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 시나리오를 한 시간 만에 읽고 출연을 결정했다고 들었다.
= 한국영화에서 여배우 원톱 영화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내용도 재밌을 뿐더러, 철저하게 여성 캐릭터가 혼자 극을 이끌어간다는 희소성에 끌렸다. 박찬욱 감독님이 칭찬을 아끼시는 분인데 "근래에 본 최고의 각본"이라며 출연을 권하셨던 점도 크게 작용했다.
▶ 순수와 잔혹의 경계를 허무는 수남 캐릭터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 흥미로운 캐릭터다. 한 여성이 자신의 행복을 가로막는 이들을 응징하는 내용으로 이해했다. 초반 한 남자와의 사랑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만큼 로맨틱하면서도 아이 같은 여성으로 표현하려 애썼다. 극중 수남의 글씨체도 실제 다섯 살 조카가 한글 공부하는 걸 보면서 접목시킨 것이다.
▶ 작업화를 신고 오래된 휴대폰을 쓰며 거리를 누비는 수남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 감독님은 수남이 꽃무늬 옷을 입는 걸로 설정하셨었다. 캐릭터를 예쁘게 보이도록 배려해 주시는 모습에 기분이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제가 머릿속에 그려 온 수남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될 것이라는 걱정이 컸다. 첫 만남부터 그런 얘기하는 게 월권인 것 같아서 망설이다가 첫 촬영 때 "예쁜 옷을 입고는 촬영하기 힘들 것 같다"는 말씀을 드렸다. "생계 잇는 데 급급한, 외모에 신경을 쓰기 힘든 생활의 달인 같은 모습으로 가면 좋겠다"고 말이다. 감독님도 "같은 마음"이라고 하시더라. 바로 촬영을 한두 시간 늦추고 조끼 등 의상을 준비했다. 그런 식으로 현장에서 캐릭터에 대한 소통이 꾸준히 이뤄졌다.
= 처음 접했을 때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가 떠올랐다. 잔인하지만 카타르시스를 전한다는 점에서 그랬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반응이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롤러코스터 타듯이 소리지르고 웃고 하시는 모습이 너무 재밌었다. 신기하고 뿌듯하기도 했다. 관객 반응에 감동받았다.
▶ 극중 수남이 자살을 기도한 남편을 붙들고 "살려 주세요" "도와 주세요"라고 오열하는 장면은 절박한 상황에 내몰리는 캐릭터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 감독님이 컷을 끊지 않으시고 계속 이어가는 와중에 무의식적으로 나온 대사다. 베테랑 연기자들과 함께한 덕에 특별한 리허설 없이 한두 테이크 만에 찍을 수 있었다. 감독님 역시 배우들이 마음껏 열정을 뽑아낼 수 있도록 기다리고 기다리는 스타일이다. 이러한 점이 만나 시너지 효과를 낸 것 같다.
▶ 작품을 선택하는 데 특별한 기준이 있나.
= 연기자로서 각인될 수 있는 캐릭터를 맡고 싶은 마음이 크다. 사실 지금 한국영화 안에서 여성 캐릭터가 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는 않다. 독립영화의 경우 그러한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면이 있기에 끌린다. 여성 캐릭터가 부각된 '차이나타운' '암살'을 비롯해 곧 개봉하는 '협녀: 칼의 기억'이 잘 돼, 여성 캐릭터가 활약하는 시나리오도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 삶의 나락으로 내몰리는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감정이입에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나.
= 의외로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뉴스에서 하우스푸어, 비정규직 문제 등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지 않나. 제 친언니가 넷인데, 모두 시집 가 살면서 집 걱정, 돈 걱정을 한다. 주변에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지인들도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행복지수가 몹시 낮은 사회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 촬영장에서 '교복을 또 언제 입어보나'라는 마음에 신나면서도 아쉽더라. (웃음) 저도 언젠가 늙을 텐데 10대 역할은 할 수 있을 때까지 하고 싶다. 지금 빨리 남자를 만나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좋은 상대를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싶다. 나이 들수록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맞춰가기보다 '나랑은 안 맞아'라는 생각에 쉽게 포기하는 것 같다. 제 일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 극중 수남 캐릭터는 순수하지만, 저변에 삶의 무게를 지닌 어두움도 지니고 있다. 이를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드는데, 힘들었던 지난 시간들이 도움을 줬다고 보는지.
= 만약 데뷔작 꽃잎에 이어 이번 영화를 바로 찍었다면 극중 표정이 안 나왔을 것이다. 지난 시간 속에서 연기의 폭이나 표현이 다양해질 수 있었다고 본다. 지금 나이에 이 영화를 만난 게 다행이다. 영화를 접하신 관객분들도 "이런 캐릭터는 처음이다" "배우 이정현을 이번에 알게 됐다"는 말을 해 주시는 데 감사하더라. 영화가 개봉하면 더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 배우인생 20년을 되돌아보면.
= 최고의 인기도 누려봤고, 슬럼프도 겪어 오면서 아쉬운 점도 많다. 불행을 겪을 때마다 포기하는 법도 배웠다. 무엇보다 열심히 살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큰 보람을 느낀다. 이 모두가 배우로서 제 표현의 영역을 넓혀 준 것들이라 여긴다. 이번 영화가 잘 돼 여배우들이 활약할 수 있는 작품이 보다 많이 나오는 데 보탬이 됐으면 한다. 그래야 저도 더 열심히 연기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