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양심의 목소리'가 아베 귀에 들릴까?

일본의 문화·정치계 거목들. 오에 겐자부로, 무라카미 하루키, 미야자키 하야오, 무라야마 도미이치, 고노 요헤이, 나카소네 야스히로, 하토야마 유키오. 그리고 아베 신조 현 일본총리. (사진=한국일보 제휴사/노컷뉴스 자료사진)
오에 겐자부로(80)는 일본의 대표적 양심으로 꼽히는 작가다. 그가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식 자리에서 했던 연설은 지금도 일본사회는 물론 아시아 전역에서 회자된다.

"일본이 특히 아시아인들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2014년 7월에는 평화헌법을 개정하려 드는 아베 신조 총리를 향해 "헌법에 대한 경외심을 갖지 않는 드문 인간"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지난 3월 서울을 방문한 그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가 충분히 사과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제대로 사과해야 한다"고 쓴 소리를 했다. 5월 3일 일본 헌법 시행 68주년 기념일에는 "아베가 지난달 29일 미국 상하의원 앞에서 한 연설은 너무 노골적인 거짓말"이라고 질타했다. 같은 달 13일 자신의 장편소설 <익사> 출간에 맞춰 한국에 온 그는 "일본 정부나 국민이 충분히 사죄했다고 말할 수 없다" 며 "일본에서 이런 부분에 대한 속죄가 필요하다고 요구를 해나가야 한다는 움직임에 찬성한다"고 말했다.

일본 최고 베스트셀러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66)는 지난 4월 "상대국이 됐다고 할 때까지 사죄해야 한다"며 정치인들의 역사인식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그는 네티즌과의 채팅 도중에 아베 총리에 대한 존경은커녕 인격조차 의심스럽다는 듯 "아베 따위…" 라는 표현을 써 전국을 시끄럽게 만들기도 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75)도 지난 13일 평화헌법을 고치려 드는 아베 총리에 대해 '어리석은 일' 이라며 작심한 듯 비판했다. 그는 "침략을 반성하는 데 정치적 고려가 있어서는 안 된다"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강력한 일본제국을 부활시키겠다는 아베 총리의 야심을 비판하는 예술인들을 반골 기질이 다분한 성향 때문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아베 총리의 역사인식과 제국부활에 대한 망상을 지켜보는 기성 정치인들의 양심의 목소리도 울림이 크다. 무라야마 도미이치(91) 전 총리와 고노 요헤이(78) 전 관방장관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지난 6월 도쿄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역사를 직시하는 것이 일본을 위한 일"이라고 말했다. 정치인들에게 '역사반성'을 주문한 것이다. 같은 달 일본 지식인 281명은 "침략과 식민지배가 중국 한국 등 아시아 나라 사람들에게 손해와 고통을 초래했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반성과 사죄의 마을을 다시 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성명을 냈다.

이런 일련의 반성과 사죄에 대한 호소와 움직임도 일본 내 진보성향의 정치인과 지식인들의 사상적 토대에서 피어난 결과물이라고 평가 절하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본 보수의 대부로 불리는 거목 정치인이 목소리를 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97) 전 총리는 7일 주요 보수 매체에 보낸 기고문에서 아베 신조 총리 등 현역 정치인들의 역사 인식과 주변국 외교에 대해 고언을 했다. 그는 "과거에 대한 솔직한 반성과 함께 언동을 엄히 삼가야 한다"면서 "민족이 입은 상처는 3대, 100년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베 담화에 '침략과 사죄'라는 표현이 포함되어야 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과거의 역사를 직시하고 무라야마 담화, 고이즈미 담화를 답습한 토대 위에서, 일본의 성의 있는 '표현'은 앞으로도 시대의 흐름 가운데 포함되어 가야 한다"고 말했다.

12일은 하토야마 유키오(68) 전 일본 총리가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찾아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두 손바닥을 모아 합장한 채 고개 숙여 묵념을 했다. "일본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죄송하고 사죄한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14일 발표될 아베 총리의 담화문에 "한국을 식민통치하고 다른 나라를 침략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로 담겨야 한다"고 지적했다.

드디어 14일이다. '일본 세계대전 패전 70주년'을 하루 앞두고 아베 총리의 담화가 발표되는 날이다. 문화 예술인과 지식인, 정치인, 진보와 보수에 이르기까지 담화 안에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담을 것을 요청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은 아베 총리가 어떻게 나올지 예의 주시하고 있다. 강한 일본제국의 부활을 꿈꾸며 역사적 사실을 수정하고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바꾸려는 아베의 위험천만한 야망을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 흑·백의 돌을 주고받는 바둑판 수 싸움 같은, 일본 내부의 역사인식을 둘러싼 공방을 멀찌감치 서서 지켜만 봐야 하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의 신세가 왜 이리 처량해 보이는 걸까. 광복절을 앞두고 일본 총리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조바심 내며 쳐다보는 모양새도 왜 이리 씁쓸할까. 그런 감정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똑바로 대응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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