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외눈박이 나라'

(일러스트=스마트이미지 제공)
초가을 아침이다. 문득 류시화 시인의 시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이 생각나 시집을 찾아본다. 아름다운 사랑 노래다. 그런데 시를 읽고 행복하지가 않고 오히려 우울했다. 왜일까? 다시 한 번 읽어본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 사랑하고 싶다 /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比目)처럼 / 사랑하고 싶다

역시나 마음이 무거운 까닭은, '외눈박이 물고기'가 사랑할 대상을 쫓아버리려는 2015년 초가을의 대한민국 때문이었다. '외눈박이 물고기'는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녀야 좌·우의 온전한 눈으로 세상을 보며 살 수 있는데, 우리에게서 그런 상대를 빼앗으려 드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 아닐까 하는.

가을 문턱부터 '외눈박이'의 시선으로만 세상을 보게 하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1974년 유신 독재시절도 아니고 1980년 신군부 독재 시절도 아닌 2015년 민주주의 시대를 사는 평범한 시민들에게 이런 흐름이 읽히는 것은 불행이다.


임기 반환점을 돌고 있는 박근혜 정부가 작심한 듯 대마(大馬)를 잡기 위한 포석(布石)을 놓고 있다는 의혹이 든다.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현상들은 걱정을 넘어 우려와 불안, 과거의 쓰라린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국정교과서 부활 움직임, 문학창작기금의 정치검열 의혹, 공영방송 3사 이사회의 보수인사 장악 등이 그것이다. 이 모두가 문화정책과 연관된 것들로 두려움의 강도가 크다. 교과서의 이념적 통일성과 서술의 획일화, 예술인들의 창작활동 검열, 공영방송사 이사진의 우편향 등은 시민정신의 물꼬를 바꾸는 위험천만한 시도로 읽힌다.

먼저 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를 보자.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이 국정으로 바꾼 뒤 37년 만인 2011년 검정으로 복귀된 것을 박근혜 대통령이 다시 국정으로 환원하겠다고 나섰다. 아이들에게 하나의 교과서를 강요하는 건 사회전반에 획일적인 발상과 전체주의적 사고를 확산시킬 우려가 높다. OECD 34개국 가운데 국정교과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터키와 그리스뿐이다. 저의는 뻔하다. 좌편향 진보주의 색깔을 없애고 우편향 보수의 교과서로 통일시키려는 의도다.

문화관광부 산하 문화예술위원회의 예술인들에 대한 검열 의혹도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작가를 사장시키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 문화예술위가 2015년 문학창작기금 지원대상자 선정에서 문재인 후보 지지연설을 했던 이윤택씨의 희곡을 탈락시키라고 지시한 것,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한 듯한 연극 <개구리>를 무대에 올린 박근형 교수의 공연작품에 대한 제작지원을 바꾸라고 종용한 것도 마찬가지다. 보수우익의 확장과 점거를 통한 문화융성이다.

KBS, MBC, EBS 공영방송 3사 이사회가 모두 뉴라이트 인사들로 채워진 것도 '오목눈이 물고기들'의 합창과 같다. 좌·우 두 눈을 모두 뜨지 않고는 한쪽 눈으로만 볼 수밖에 없다.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사고하다 보면 편견을 갖게 되고, 반대쪽을 보지 못하니 균형감각을 잃게 된다. 공정방송을 기대하기 어렵다.

초가을 들어와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문화정책이 그렇다. 문화융성을 주창한 정부의 문화정책이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되지 않으려면 또 다른 ‘외눈박이 물고기’를 만나 조화로운 짝을 이루고 함께 헤엄치도록 해야 한다. 정부가 앞장서야 하는데, 정작 정부는 대한민국을 오른쪽 눈만 가진 ‘외눈박이’들의 나라로 만들려고 작심한 것 같다.

한 나그네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외눈박이 사람'들이 사는 나라로 잘못 들어간 '우화'가 떠오른다. 나그네는 결국 두 개의 눈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한쪽 눈을 찔러 '외눈박이'가 되고 만다. 대한민국이 39년 전과 같은 '우화의 나라'로 되돌아가지 말란 법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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