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장수왕의 평양 천도…'악수'였나 '신의 한 수'였나

(사진=KBS 제공)
동북아시아의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고구려의 장수왕은 400여 년간 도읍지였던 국내성을 떠나 돌연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다.

장수왕의 평양 천도는 고구려의 중심을 한반도로 좁힌 악수인가, 아니면 고구려에 최전성기를 가져온 신의 한 수인가.

오는 20일 밤 10시 35분 KBS 1TV에서 방송되는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고구려 장수왕, 평양 천도하던 날'이라는 주제로, 평양 천도와 함께 최전성기를 맞이한 고구려의 모습을 짚어본다.


'평양(平壤)으로 수도를 옮겼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15년)

단 한 줄의 평양 천도 관련 기사다. 국가의 중심지이자 고위 지배층의 세력 기반인 도읍지를 옮기는 것은 국운을 좌우하는 중대한 일이다. 자연스레 400년 도읍지인 국내성을 기반으로 성장한 고구려 귀족들의 반발도 거셌을 것이다.

하지만 삼국사기에서 천도와 관련된 기록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평양 천도가 그 이전부터 기획되고 준비된 것은 아닐까?

장수왕의 아버지 광개토대왕은 재위 2년, 평양에 아홉 개의 불교 사찰을 창건한다. 그리고 재위 19년에는 동쪽에 여섯 개의 성을 짓고, 평양의 주민들을 이주시킨다. 즉, 광개토대왕 때부터 평양 천도의 기획이 준비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평양 천도는 아버지 광개토대왕과 아들 장수왕 2대에 걸친, 장대한 국가적 개혁의 상징인 셈이다.

◇ 한반도 남부 긴장 고조…백제·신라 동맹 맺고 고구려 견제

(사진=KBS 제공)
고구려는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뒤, 바닷길을 이용해 중국의 여러 나라와 활발히 교류할 수 있게 됐다. 당시 중국은 수많은 나라가 난립하던 5호16국 시대를 끝내고, 유연·북위·송 3개 강국이 안정적으로 세력을 재정립하고 있었다.

이들 세 나라는 서로를 끊임없이 견제하며 크고 작은 전쟁을 반복했지만, 고구려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한다.

이렇듯 고구려는 수상 교통의 요지인 평양의 지형적 특성을 이용해, 민감하게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장수왕의 세련되고 뛰어난 외교술, 만주 대륙을 호령하던 군사력 덕에 고구려는 동아시아 4강의 한 축으로 떠오른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한반도 남부에는 긴장감이 고조된다.

당시 한강 유역의 주인이던 백제와 고구려에게 오랜 내정 간섭을 받아 온 신라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동맹을 맺는다. 그렇게 고구려 남쪽 전선의 긴장감은 높아만 간다.

평양의 방어망을 탄탄히 구축할 필요를 느낀 82세의 장수왕은, 475년 마침내 3만 대군을 이끌고 한성을 공격한다. 4방면으로 나누어 공격을 퍼부은 고구려군은 7일 만에 북성을 점령하고, 도망치던 백제 개로왕을 죽인다.

이로써 고구려는 백제의 500년 도읍지 한성을 점령하고, 금강 유역까지 진격한다. 고구려 700년 역사상 최대 영토를 구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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